주로 특급호텔에서 묵게 될 것이라고 했던 대로 숙소는 깔끔하고 안락하다. 다만 커피포트와 냉장고가 없거나 비어 있었는데, 가이드 말로는 한국여행객들 때문이라고 한다. 국내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여행 프로그램에서도 선보인 것처럼 커피포트에 라면을 끓이고, 가져온 김치와 반찬을 넣기 위해 냉장고 안에 넣어둔 상품들을 꺼내는 등 객실비품이 수난을 당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생긴 호텔들의 자구책이라는 것이다. 숙소에 따라서는 짐은 물론 사람까지 보안검색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간간히 일어나는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조처라고 한다. 설마 했지만, 막상 이스탄불에서 첫날 묵은 튀얍 팰리스호텔의 로비에서 검색대를 만나면서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음날 아침 식당에 가면서 로비를 내려다보니 로비 바닥을 장식한 기하학적 무늬가 살벌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것 같다.
먼저 터키에 대하여 요약해보아야 할 것 같다. 한자어로 토이기(土耳其)라고 하는 이 나라의 공식명칭은 터키공화국(Republic of Turkey)이며 수도는 앙카라이다. 아시아대륙의 북서쪽 끝에 위치하며 유럽대륙의 복부를 향하여 툭 튀어나온 반도국가인 터키의 면적은 78만 580㎢이고, 해안선의 길이는 7,200㎞에 달한다. 반도의 서쪽은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지만, 북쪽은 흑해성 기후를 보인다.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8,069만 명이며, 터키인이 80%, 쿠르드인이 20%, 그리고 소수의 아랍인 등으로 구성된다. 언어는 터키어가 공용어이지만 쿠르드어와 아랍어 등도 사용된다. 종교는 인구의 98% 이상이 이슬람교이며 주로 수니파에 속한다(1).
기원전 2세기경에는 히타이트인들이 거주했고, 기원전 8세기 말 메가라 출신의 그리스인들이 보스포루스해협에 진출하여 도시들을 건설했다. 도시국가들 중에 이스탄불의 아시아지역에 세운 칼케돈과 황금뿔만(Golden horn) 건너편에 세운 비잔티움이 중요했다. 기원전 513년 페르시아에 점령되었지만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 실패로 독립을 되찾았다.
비잔티움은 보스포루스해협을 통과하는 배로부터 거두는 통과세와 중계무역으로 부를 쌓아 막강한 국력을 보유하여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의 전성기에도 마케도니아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스에 이어 로마가 소아시아로 세력을 확대할 때도, 로마편에 서서 번영을 누렸지만, 기원전 146년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다가 기원후 73년에는 아예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서기 196년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배루스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한 페스켄네우스 니게르의 편에 섰던 비잔티움은 난이 평정된 다음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지역이 가지는 전략적 중요성은 어쩔 수 없었던지, 새로 이주한 사람들에 의하여 신속하게 재건되었다.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를 동서로 나누는 개혁을 단행했는데, 그 배경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압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제국의 동부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서기 328년 11월 4일 성대한 기공식과 함께 비잔티움 지역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여 콘스탄티누폴리스라고 명명하였고, 도시가 완공된 330년 5월 11일 천도를 단행하였다. 콘스탄티누폴리스는 1,453년 오스만제국에 함락될 때까지 1,123년 동안 제국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2).
서기 565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절 서쪽으로는 아프리카의 북부 지중해연안을 거쳐 이베리아반도의 남부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이집트를 넘어 에티오피아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시리아를 거쳐 소아시아반도의 동쪽으로 아르메니아지역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이탈리아의 북쪽을 지나 불가리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다스리던 비잔티움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굴복할 무렵에는 발칸반도의 남쪽으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1281년에 성립된 오스만 투르크는 1354년에 유럽에 진출하고 16세기에는 에게해와 흑해를 내해로 만들 정도로 영토를 넓혔으며, 남쪽으로는 에티오피아를 거쳐 중앙아프리카까지 그리고 아라비아반도의 남쪽 예멘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크리미아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빈을 위협할 정도로 영토를 확장하였지만 17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가담하여 패전국이 되어 1920년 8월 10일 연합국과 체결한 세브르강화조약에 따라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콘스탄티노플의 배후지와 아나톨리아고원으로 축소되었다.
터키는 1949년 8월 14일 대한민국을 승인하였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2005년 당시 노무현대통령이 처음으로 터키를 국빈 방문했을 때, 공항에 영접을 나온 터키대통령이 ‘어서 오십시요 형제여’라고 했대서 화제가 되었다.
흔히 6.25동란에 11,000여명의 병력이 참전하였고 3,000여명의 사상자가 생기는 희생을 치렀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그러나 터키와 대한민국이 형제지국이라고 하는 진짜 이유는 터키 민족의 뿌리가 되는 돌궐족이 고구려와 연합해서 중국과 싸우면 형제의 결의를 한 것에 기원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유럽제국을 공포에 떨게 한 오스만 투르크의 뿌리는 동쪽으로 이어져 돌궐족에 이르고, 돌궐족은 다시 대 훈제국으로 알려진 흉노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시 흉노족의 뿌리는 알타이산맥 북서쪽에 살던 안드로노보 문명에 이른다는 설이 있다. 알타이산맥과 텐산산맥 부근에 웅거하던 돌궐족이 서진하게 된 것은 중국의 세력이 강성해진 것과 관련이 있다. 유목생활을 주로 하던 투르크족이었기 때문에 생활환경에 따라 이주가 자유로웠을 것이다.
투르크족은 서쪽으로만 방향을 잡아 터키로만 이주한 것이 아니라 일부는 흑해 북쪽을 거쳐 동유럽과 발칸으로 들어가 훈, 아바스, 불가리아와 같은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여 로마제국을 압박했다. 일부는 흑해 부근에 자리를 잡았고,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 머문 투르크족도 있다. 터키민족의 원류에 해당하는 오구즈족은 소아시아에 이르러 셀주크 투르크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른다(4).
이처럼 투르크족은 수천년 동안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일대에서 100여개의 크고 작은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투르크족은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단일 영역 아래 뭉친 적이 없다. 그것은 개성이 강한 유목민족의 특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참고자료
(1) 다음백과사전. 터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9145
(2) 유재원 지음. 터키, 1만 년의 시간여행(1) 15-19쪽, 책문, 2010년.
(3) 다음백과사전. 비잔티움제국.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24XXXXXX2989
4) 쉴레이만 세이디 지음. 터키 민족 2천년 사, 애플미디어,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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