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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양의 느낌

[메디칼타임즈=순천향의대 3학년 오명인 ]당근 마켓에서 노란색 아레나 오리발(덕핀)을 샀다. 오리발은 신발과 달리 치수가 다양하지 않아 발에 꼭 맞기 어려운데도, 눈대중으로 산 오리발은 이상하리만큼 발에 꼭 맞았다.새롭게 해보려고 했던 것들이 모두 마음대로 되지 않아 그 주에 유일하게 성공한 일이 '오리발 당근', 그것뿐이었다. 수영 강습에서 필요해 구매한 것이었지만 오리발이 손에 들어오니 갑자기 바다 수영이 하고 싶어졌다. 그것도 맑고 깨끗하고 초록빛이 도는 제주 바다가 좋을 것 같았다.​그렇게 비행기 출발 열두 시간 전에 비행기표 결제 버튼을 눌렀다. 나의 계획형 친구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큰 배낭 하나에 모든 짐을 넣고, 사놓고 읽지 않은 <대양의 느낌>도 가방에 끼워 넣었다.비행기에서 펼친 책의 서론에서 저자는 대양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이 세상 밖으로 떨어질 수 없고, 우리는 완전히 그 안에 있다는 느낌'. 바다를 볼 때, 우리는 세계와 연결되어있는 유기성을 느낀다는 것이다. 비행기 창문 밖으로 대양을 내려다보며 과연 내가 유기성을 느끼는지 시험해 보았다.이미 땅은 보이지 않고, 사방으로 파란 물과 그 위의 잔물결이 내가 볼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내가 느끼는 것은 고독감에 가까웠다. 나에게 바다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가 더 편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공간이자, 성인이 된 후에도 혼자가 될 필요가 느낄 때마다 찾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 서론에서부터 공감에 실패한 채, 더 읽어볼 시간도 없이 비행기는 순식간에 착륙했다.​제주도는 유명한 관광지인 것에 비해 대중교통 상황이 좋지 못하다. 버스를 한 시간이나 타고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주택을 개조한 조그만 게스트하우스로, 흰 페인트칠이 되어있는 벽이 지중해를 연상시켰다.공용공간에 나 있는 큰 창문으로 제주의 바다가 한눈에 담겼다. 푸른 바다와 맑은 하늘은 경계가 불분명해 보일 정도였다. 숙소에 묵는 사람은 자전거를 무료로 빌릴 수 있었기에, 나는 수영복과 수경, 오리발만 간단히 챙겨 자전거로 20분 거리에 있는 포구로 출발했다.​휴가철이 지나서인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파도가 꽤 강해 보였지만 망설이지 않고 바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생각보다 강한 파도에 오리발을 낀 발이 자꾸 돌아가서 방향을 잡기가 어려웠다.결국 오 분 만에 오리발을 바위에 올려두고 자유를 얻은 발로 한결 가볍게 잠수 또 잠수했다. 멀리 헤엄쳐 나가도 힘을 풀고 떠있으면 파도가 포구 가까이로 데려다주었다. 스노클링을 하려고 온 것은 아니었는데 스노클링 장비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면 색색의 물고기를 볼 수가 있었다. 나는 제주 바다에 그렇게 다양한 물고기가 있는 줄 몰랐다.노을이 질 때쯤, 바다가 잘 보이는 카페에 앉아 내가 본 물고기들을 기억을 더듬어 그리기 시작했다. 기억은 언제나 불확실하지만, 인상은 강렬하기 때문에 기억과 인상 사이의 스케치를 해 놓으면 몇 년이 지나도 쉽게 추억에 젖을 수 있다.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다, 문득 수영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 이 하루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텅 비어서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몰랐던, 채울 필요도 느끼지 않았던 유년 시절부터 시작한 것들로, 마치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의례 같았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나는 이제 비어 있는 하루를 불안해하는 어엿한 현대인으로 자랐다.하지만 과거는 현재로 흐르고 현재는 또 미래로 흘러 나는 순리대로 과거에 했던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결국 나의 삶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던 마음에 도착한 곳에서 과거를 이어서 살고 있다는 것만 확인하게 된 셈이다.​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이전의 삶을 이어서 살 뿐, 결코 새로운 삶을 살 수 없다' 우리는 이전의 삶과 우리를 끊어버릴 수도, 우리를 이 세상 밖으로 던져버릴 수도 없다.이 말은 엉망 같은 현재를 초기화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실망을 안겨주겠지만, 지금껏 쌓아온 것이 무로 돌아갈 일은 없다는 응원이기도 하다. 마음에 들든 혹은 마음에 들지 않든 나의 과거를 이어서 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삶의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돌아가면 여행 때문에 밀린 일을 누군가 대신해 놓았거나, 풀리지 않던 일이 거짓말 같이 해결되어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신 내가 완벽하지 않게 일을 해결하고 또 그다음 일을 해결할 것이다. 그러다 지친 마음으로 다시 홀로 바다를 찾으면 견고한 모습으로 나를 다시 해안가로 밀어주리라는 기대감, 그것이 내가 느끼는 대양의 느낌이다.
2024-12-30 05:00:00젊은의사칼럼

평범하고 풍부한 삶을 위한 안내서

[메디칼타임즈=단국의대 1학년 유우선 ]"어딘가에도 썼지만, '자신에게 전부인 하나를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당해내질 못한다."위의 문장은 신형철 문학 평론가가 작성한 평론의 일부이다. 나는 종종 이 문장을 떠올리곤 하는데, 아마도 이 문장이 '주인공'의 소양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치명적인 매력으로 거대한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주인공들은 명확한 공통점을 하나 가지고 있다.주인공은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단 한 가지, 그러니까 강한 '신념'에 따라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자신이 살고 싶은 세계를 온전히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이는 주인공의 특권이며, 신념을 따르는 삶이 위대한 이유이다.그러나 내가 이 글에서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위대함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선뜻 자신의 것으로 취하지는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주인공의 삶을 타인의 전유물로만 인식하는 것일까? 어째서 우리는 스스로를 엑스트라로 주저 앉힐 수밖에 없는 것일까?이 질문들을 해결하기 위한 안내자로 이 글에 한 주인공을 등장시키려 한다. 신념을 따라 흘러가는 그의 삶은 자체로 위대하며 또 위험하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주인답지 않게 그는 놀랍도록 평범하고 수줍다. 이 모순적인 주인공의 궤적을 따라간 끝에서, 당신이 위에 제시된 질문을 뛰어넘는 답을 찾아낼 수 있길 바란다.위대하고 위험한 지시등을 따라우리가 만날 안내자는 존 윌리엄스 작가의 소설 <스토너>의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이다. 이 작품은 윌리엄 스토너의 전 생애를 무심한 필체로 담아내고 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너는 농업을 공부하려 대학에 가지만, 영문학의 매력에 빠져 영문학 교수로 진로를 변경한다.교수가 된 스토너는 타인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천천히 인생을 흘려보낸다. 작품은 조용한 스토너의 성품처럼 고요하게 시작되어, 임종 직전 스토너의 회고와 함께 또 고요히 끝을 맺는다.작품을 읽는 내내 우리는 스토너와 함께 그의 인생에 들어온 크고 작은 선택에 직면한다. 스토너는 부모님의 기대처럼 농부가 될 것인지, 자신이 원하는 영문학 공부를 위해 대학에 남을지 선택해야 한다. 또 전쟁이 발발했을 때 모두가 당연시하는 입대를 할 것인지, 학교에 남아 학문의 길을 지킬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이렇게 선택의 기로는 늘 선지도 그에 따르는 기회비용도 다양하나, '윌리엄 스토너'라는 인물에 대해 점점 더 알아갈수록 우리는 쉽게 그가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예측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주인공답게 너무나 명확한 '신념'을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영문학에 대한 자신만의 진지한 프라이드와 확고한 열정이 있다.스토너는 영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가업을 잇는 것을 포기하고 학교에 남는다. 또 그는 국가와 인간에 대한 헌신은 대학에서 교육의 도를 지키는 것이라는 판단 하에 군대에 가지 않고 영문학 연구에 전념한다.스토너는 때로 주저하고, 때로 타인이나 본인의 내면과 고통스럽게 갈등하지만, 결국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일관되게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한 스토너의 면모는 작품의 절정에 해당하는 갈등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중년의 교수가 된 스토너는 자신의 문학 수업을 수강하는 학생 '워커'의 발표에 낙제점을 준다. 그의 발표는 문학에 대한 어떠한 고민도 묻어나지 않은 궤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커는 학장 '로맥스'에게 총애를 받는 학생이었고, 로맥스는 스토너에게 워커의 장래를 위해 낙제점을 거두라고 요구한다.스토너는 고민 끝에 결국 워커의 발표는 낙제점 외의 다른 점수를 줄 수 없다는 결단을 내린다. 이에 앙심을 품은 로맥스가 스토너의 수업과 교수 승진에 불이익을 주어도,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이 그의 문학적 소신에 의구심을 가져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흔들림 없이 영문학 수업에 매진한다. 그 모습에, 우리는 이 고독하고 답답한 교수 스토너를 주인공으로 인정하게 된다.신념을 가지고 주저 없이 이를 따르는 것은 우리 삶을 의미로 가득 채운다. 모든 순간 내가 옳다고 믿는 선택을 하고, 그로 인해 형성되는 세상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자신을 다른 사람의 세계에서 한 걸음 멀어지게 할 수도 있고, 스스로 포기한 선택지가 이후 진리로 밝혀질 수도 있다.마치 스토너가 워커에게 낙제점을 거두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불이익을 받고, 그러한 결단이 학문적으로 적합했는지 확신조차 얻지 못한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신념을 따르는 이들을 위대하다 칭송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삶에서는 신념을 따르기보다는 두려움에 타협하는 것이다. 신념이라는 지시등은 근사하게 길을 밝혀주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울 정도로 눈 따갑게 번쩍이기 때문에.평범한 사람이지만 누구보다 풍부한 삶을 살아가는이제 당신은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스토너가 주인공답게, 이러한 외부의 핍박과 내면의 갈등을 어떤 식으로 멋지게 극복했는지. 그렇다면 나와 스토너는 당신에게 실망밖에 안길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스토너는 그냥 살아간다. 계속 핍박받고, 실패하면서. 스토너 스스로도 임종 직전에 씁쓸하게 자신의 삶을 평가한다."그는 냉혹한 눈으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신의 인생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작품의 담담한 묘사처럼 '윌리엄 스토너'는 특징 없는 생김새의 그저 그런 문학 교수이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에만 몰두하고, 교수 직책에 모자라지 않게끔만 임하며, 아내에게도 딸에게도 데면데면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당신이 실망한 바로 그 지점, 평범하기 짝이 없는 바로 그 미지근한 온도가 내가 스토너를 우리의 안내자로 선택한 이유이다. 스토너도 신념을 따르는 것을 두려워한다. 로맥스가 안긴 불이익으로 인해 줄어든 수입이 사랑하는 딸을 키우는 데에 걸림돌이 되자 괴로워하고, 워커와의 갈등에서 문학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틀렸을까, 자신의 처신이 적절하지 않은 것일까, 끝없이 고민한다. 그러나 스토너는 끈질기게 맞부딪힌다.기초 문법 수업 여러 개를 맡아 부족한 월급을 충당하고, 더 많은 공부와 재고를 통해 내린 자신의 결론이 최선이라 확신하자 뒤돌아보지 않는다. 스토너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지, 그 간단한 논리를 확인한다.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신념을 지킬 수 있는 타개책을 마련하고, 끊임없는 고민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갈고 닦아 타인에게도, 본인에게도 설득력을 갖출 수 있는 신념의 근거와 힘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렇게 미지근하되 끈질긴 점도의 삶을 살아가며, 독자에게 위대한 삶의 문을 여는 열쇠를 건네는 스토너를 어떻게 주인공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스토너>는 출간 직후에는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수십 년 뒤 한 출판사 편집자가 헌책방 주인에게 추천을 받아야 재발행 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당시 <스토너>는 "어떤 의미에서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다른 누구 못지않게 풍부한 삶을 살아가는 당신에게"라는 문구와 함께 재발행된다. 꼭 스토너가 말하는 것 같다. 풍부하다거나 위대하다는 말에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열정을 따라 사는 것은 당신도 할 수 있다며. 특유의 고요한 어투로.펜을 넘겨드립니다여기까지, 스토너의 안내는 끝이 났다. 당신은 이제 알고 있다. 신념은 두렵지만 아주 남의 것만은 아니며, 벅찰 수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어렵지만도 않다는 것을. 평범한 당신에게서 올곧은 마음이 나오지 못한다고 의심하지 말고, 공부하고 고민하여 강한 신념을 마련하자.위대한 삶은 대단한 사건에서 나온다 단정하지 말고, 가까이에 있는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스스로 옳다 생각하는 선지를 따르자. 당신의 주인공이 되는 당신이 이끄는 서사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스토너'라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쓰던 내 손의 펜을 당신에게 넘겨본다. 당신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싶은가? 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오늘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어딘가에서 마주할 당신의 이야기를 기대하며, 나도 이제는 또 다른 펜을 꺼내 들었다. 한편으론 평범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위대한 나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위해.
2024-12-23 05:00:00젊은의사칼럼

글의 힘

[메디칼타임즈=연세의대 4학년 박태웅 ]나는 항상 겨울을 기다렸다. 겨울은 올해 어지간히 바빴던 것 같다. 거리의 은행나무들이 짐을 모두 덜어내고 앙상한 몸을 드러낼 때조차 오지 않았다. 나는 거리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보며, 말로만 뱉던 기후 위기가 이렇게 와버린 걸까, 더 이상 눈을 볼 수 없는 걸까, 그런 망상에 빠져 길을 걷곤 했다.그러다 하루아침에 추워져 반바지와 슬리퍼로는 차마 밖을 내다닐 수 없을 때, 그제야 안심하며 패딩 위에 소복이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상자에 담긴 겨울옷들을 하나둘 꺼내며 쌓였던 먼지 속에 담긴 시간을 떠올렸다. 순간들을 하나씩 꺼내 우물우물 씹은 뒤 삼키는데, 목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았다. 분명 바쁘면 바쁨 속에서 행복을 찾고, 여유로우면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며 올해를 보냈다.매일 충만한 삶을 살았다고 믿었는데 모아보니 이토록 버거운 한 해였다니, 놀라웠다. 물론 지금을 잘 살아냈음에 뿌듯함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나는 한해가 끝나감을 마냥 웃으며 바라볼 수 없었다.사람들은 언제나 부딪치고 다퉜지만, 작년까지 대부분의 잡음은 문밖에 머물렀다. 올해는 달랐다. 중동과 우크라이나의 위기, 대통령을 둘러싼 논란들, 동덕여대 시위, 트럼프 당선, 차별금지법 반대 시위, 여러 키워드가 스피커를 타고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심지어 의정 갈등은 아예 문고리를 부수고 들어와 집을 마구 헤집었다. 세상이 갑작스럽게 몰락하고 있는 건지, 이제야 의대생의 작은 일상에서 튕겨 나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본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위에서 던진 키워드들에 대해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다만 충격적이었던 것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중에도 가장 부정적인 감정인 혐오가 세상에 만연하다는 사실이었다. '한남충 동현이 분탕치러 왔노 ㅋㅋ', '폭도들 감옥에 집어 처넣어라' 같은 댓글은 흔하디 흔했고, 서로를 '0찍충, 00지역 출신' 등으로 규정짓고 공격했다.아무렇지 않게 누군가를 혐오하고, 누군가에게 혐오 당하는 순간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것은 썩 불쾌한 경험이었다.원초적인 혐오를 처음 마주하고 떠오른 생각은, 대체 이런 감정이 왜 만연한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폭력적이면서 파괴적이었고, 문제를 해결하거나 개선하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 무의미한 감정이었다.허나 인터넷과 현실에서 혐오가 표출되는 여러 순간을 목격하며, 혐오가 가져다주는 즐거움과 그 전염성을 알게 됐다. 남을 짓밟는 순간에 느끼는 쾌락은 쉽게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였기에,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쾌감에 몸을 맡겼다.관계가 얕아질수록 쉽게 말했고, 실체가 없는 대상에게 더 가혹했고, 익명과 같은 가면을 쓸 수 있다면 주저 없이 과격해졌다. 그리고 그런 목소리는 SNS와 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덩치를 불렸다. 기술은 혐오에 날개를 달아줬다.나는 오래지 않아 혐오가 무지에서 비롯됨을 깨달았다. 사회는 계속해서 복잡해졌고, 개인이 이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갖기엔 한계가 명확했다. 심지어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콘텐츠들은 대부분 관심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단면만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그 단면 앞뒤에 놓인 다양한 맥락과 뒷사정은 조명받지 못한 채 지워졌다. 무지한 영역에 대해서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아야 했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세상을 재단하고 평가하면서 혐오가 시작됐다.이를 멈추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돌을 던지기 전에 일단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혐오하는 대상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현재 직업을 명시하는 그의 얄팍한 프로필과 우리의 혐오를 유발했던 행위가 전부이다.이야기를 듣는 순간, 문장 몇 개로만 정의되던 그가 맥락을 얻는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위를 한 것인지,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를 맹목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이해할 수는 있다.안타깝게도, 의대생인 내가 공대 대학원생의 생활을 듣고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삶은 단박에 받아들이기엔 너무 다양하고 이질적이었다. 이슈들도 똑같았다. 군인 장교들의 처우가 문제라는 얘기를 듣고 국방부에서 내놓는 수많은 자료를 다 읽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저 알고리즘에 뜨는 뉴스나 기사를 읽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내놓을 수 있는 여유의 전부였다.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의 이야기를 느긋하게 들어줄 정도로 넉넉하지 않았다.그래서 글을 떠올렸다. 누구나 읽을 수 있고, 누구나 쓸 수 있는 글. 그건 쉽게 써 내릴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몇 가지를 꺼내어 알맞은 단어와 문장을 찾아주는 노력, 그 과정에서 골몰하는 흔적이 글에는 그대로 담길 수밖에 없다.글은 쓴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담아낸다는 말처럼, 읽고 나면 누가 어떤 마음으로 문장을 적었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글은 타인의 삶을 받아들이기에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었다.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더라도, 글을 읽는 순간만큼은 삶과 생각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의정 갈등을 둘러싼 몇만 페이지의 통계와 자료, 보고서에 눈 깜빡하지 않던 사람들이 소아과 전공의의 글 한 편을 읽고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것처럼, 글은 삶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서로를 악마화하는 관계에서 나와 같이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자 친구임을 알게 되는 순간까지, 글은 사람들의 보편성을 상기함으로써 혐오를 막을 수 있었다.<글을 일상에 두기>글을 가까이 두기 시작했다. 일단 가리지 않고 읽었다. 스쳐 지나가는 표지가 매력적이면 집고, 책 추천을 맛깔나게 해주면 적어놨다가 빌리고, 누군가 중요한 맥락에 인용하면 찾아봤다. 의사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의 다양한 시선을 접하려 노력했다.특히 평생 볼 일조차 없을 거 같던 인류학, 페미니즘 문학, 보건 의학 등의 카테고리에 속한 책들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이를 통해 더 많은 생각을 편견 없이 읽고, 더 볼 일 없을 것만 같던 카테고리에 주저 없이 손을 뻗을 수 있었다.쓰기 또한 시작했다. 1년간 본교 교지에 글을 쓰며 세상을 비틀어 바라보는 법을, 생각을 정제하는 법을 배웠다. 올해 하반기에는 학내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글을 썼다. 무언가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선 생각보다 많은 경험과 지식이 필요했다.이미 쓰인 기사와 글들을 찾아보고,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 글에 골몰할수록 미처 알지 못했던 삶들을 마주하며 다름을 인지했다.의대 기숙사 앞의 청소노동자 시위에 얼굴부터 찌푸렸던 나는, 잠시 멈춰 그들의 현수막을 읽고 구호를 듣는 사람이 되었다.글을 받아들이는 처지에서 내뱉는 처지가 되는 것은 생각처럼 녹록지 않지만, 우린 쓰는 것 또한 익숙해져야 한다. 한아름의 생각을 떠올린다면 그 중 맥락을 가지는 건 한 움큼이고, 그중에서도 글로 담을 수 있는 건 좁쌀만큼 적다. 치열한 고민 속에서 문장을 하나씩 완성할 때마다, 우린 스스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당당하게 혐오하는 사회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혀를 끌끌 차는 정도론 기분만 울적해질 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글을 가까이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읽고 씀으로써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부정적인 감정을 하나둘 끊어내는 것이다. 글은 혐오를 이기는 가장 간단하고도 강력한 무기이다.
2024-12-16 05:00:00젊은의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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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칼타임즈=인제의대 3학년 김성재 ]<쇼미더머니>로 유명한 래퍼 자메즈(Ja mezz)는 2018년 첫 정규 앨범 <GOØDevi>을 발매한다. 예술가로서의 자아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과 그에 일조한 경험을 직설적으로 뱉어내며 다다르는 결론 중 하나는, 선악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며, 세상에 정답은 없기에 오히려 스스로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수록곡 <LOVE IN HEAVEN>의 '아마 저기 천국에선 악마도 사랑을 하네'라는 가사에는 그러한 사고가 잘 함축되어 있다. 1년 후인 2019년, 그는 두 번째 정규 앨범으로 사랑에 대한 메시지가 가득 담긴 <The pink album>을 발매한다. 앨범 소개 글은 다음과 같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사랑이란 말은 아무리 외쳐도 과하지 않다고 느껴졌다'사랑이라는 단어는 다소 유치해 보이고 순진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특히나 '요즘 같은 세상'에는 더더욱 그렇다. 계층, 인종, 세대, 젠더 모든 분야를 막론하고 첨예한 대립의 뉴스를 목도할 수 있으며, 분노한 군중들이 만든 혐오의 단어가 팽배해 있는, '요즘 같은 세상' 말이다.생각이 다른 존재를 만났을 때 서로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의견을 개진하고 상대도 그리하여 합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하지만 최근의 갈등 양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적으로 인식되는 순간 무조건적 혐오를 주고받는 행태뿐. 사실관계가 어떻건 간에 이름표가 달려있기만 한다면 누구든 사냥의 대상이 되는 현상을 보며 사람들은 작금의 세태를 '혐오의 시대'라고 칭하곤 한다. 모든 남자는 '한남', 모든 여자는 '한녀', 모든 의사는 '의주빈'이 되고만, 혐오의 시대.그렇다면 2018년 일종의 영감으로 작용할 뿐이었던 '사랑'이 1년 후 자메즈에게 혐오의 시대에 맞서는 무기가 되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어떤 인터뷰에도 그러한 도약이 가능했던 논리적 전개는 다뤄지지 않았기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나는 그저 그의 생각에 열렬히 찬동하는 한 사람으로서, '사랑'이 이 시대의 해법이라는 그의 주장을 자전적 이야기를 근거 삼아 지지하고자 한다.나는 2021년 휴학계를 제출했다. 유급이나 군대, 질병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기에 무수한 반대에 부딪혔고 나 역시도 고뇌했지만 2020년 시작된 1년의 고민 끝에 결국 휴학계를 제출했다. 누구에게나 그러하겠지만 결심부터 결말까지 결코 단순하지 않은 기승전결이었기에 누군가가 휴학에 대해 자세히 물을 때면 뭉뚱그려 답하기 일쑤였다.심지어 결과적으로도 이력서에 남길 수 있는 것은 카페에서 음료를 제조한 반년과 꾸준히 했던 봉사활동밖에 없었지만, 그 목적 없던 1년여의 가장 큰 성과는 따로 있었다.원인을 소상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휴학 이전에는 스스로를 좋아하지 않았고 신뢰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기 혐오적 성향을 가지게 되는 원인은 각자 다양하겠지만 행동 원리는 공통적으로 단순한데, 스스로에게도 못하는데 타인에게 실현할 방법을 알 리가 없으니 타인을 사랑하고 신뢰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은 불안하고 두렵기만 한 장소가 된다.불안을 줄이려면 외부와의 교류는 피상적으로만 유지해야 하고, 두려움을 줄이려면 타인을 헐뜯고 배신하며 나의 우월성을 자위해야 한다. 이 모든 톱니바퀴는 서로 양성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더욱더 크게 맞물린다. 타인을 믿지 않으니 소통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으니 더 불신한다. 오히려 타인을 깎아내리고 배반하며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늑하기까지 하다.이 모든 것은 내가 직접 가족, 친구, 연인, 타인 어떤 것도 가리지 않고 나와 다른 부분이라면 모조리 공격하며 겪은 일이니 확실함을 보장한다.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때 누군가를 깎아내릴 때 겪는 부정의 감정, 불신에 동반되는 신경증, 증오의 표현, 배신의 불쾌함 등 모든 것은 결국 부메랑처럼 나를 향하고 있던 것이었다. 소통을 거부하고 내 안에 나를 가둘수록, 그 안에서 외부를 향한 불신과 증오를 뱉으면 뱉을수록, 사실 진정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어가는 것은 나였다.타인을 혐오하는 것은 스스로를 혐오하는 행위와 동일했고 나는 안에서부터 썩어갔다. 그런 나를 악순환의 고리에서 꺼내준 것은 만화에서나 봤던 단어 '사랑'이었다.첫 단추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계획이라곤 없던 휴학 기간이었기에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마다치 않고 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닫자 그들의 이야기는 조금 더 흥미롭게 들렸고, 세상엔 사람 수만큼의 생각이 있음을 깨달았다.옳고 그른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는 불완전한 나 또한 긍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경험을 통해 얻은 나의 선호, 나의 윤리, 나의 욕구에 대한 정보는 세상에 똑바로 설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나는 나를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겨우 세상에 진정한 나를 내세울 자신이 생겼기에 그제야 소통을 회피하기보다는 다르더라도 맞서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적인 일부터 업무까지 모든 영역의 갈등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인지하며 존중하려 노력했다. 허나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불신이 주는 거짓된 편안함에 익숙했던 데다가, 무엇보다도 수학문제처럼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었던 것이다.하지만 수백 번의 일화 속, 어느 날은 기분이 좋아서, 어느 날은 해야 할 일이 급해서, 어느 날은 상대가 소중해서, 그런 날에는 먼저 감싸 안는 것에 성공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없었지만 그런 일상이 조금씩 쌓여갔다. 물론 어려움을 뚫고 손을 내밀었을 때가 모두 아름다운 결말을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먼저 듣고, 먼저 포용하고, 먼저 이해하는 것에 성공하였을 때, 단 한 가지 확실하게 발생하는 현상은, 머릿속에서 회전하던 부정의 감정과 신경증이 사라져 나 자신에게 안식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운 좋게 상대방도 호혜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그제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했다.생각이 달라 대립하고 갈등했던 대상을 이해하고 소통하여 서로를 용서하는 순간 겨우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알아차렸다. 똑같이 두렵고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가시 돋친 나의 존재조차 먼저 사랑하고 포용해주었던 이들의 존재를. 결국 그들이 나의 수많은 삽화에서 내 손을 함께 잡아주었기에 내가 사랑할 수 있었음을.나는 여전히 미숙해 때때로 무언가를 혐오하지만, 혐오는 반격의 메아리만을 낳을 뿐 어떤 것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반면, 사랑은 역설적으로 스스로에게 이로운 행위였다는 점만은 잘 알고 있기에, 들으려, 존중하려, 끝내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하지만 실제로 사랑은 현실에 만연해 있지 않다.2024년의 뉴스는 여전히 혐오와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 현실에서 신뢰의 너머에 배반이 따라온 이야기를 수없이 들을 수 있는 이유는, 나만 당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며, 혐오가 쉽고 자극적이기 때문이고, 사랑은 너무나도 어렵고 귀찮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이해하고 소통하자는 문장은 다소 이상적일지도 모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하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학자 로버트 액설로드의 저서 <협력의 진화>에 따르면 게임이론에서 상대를 기꺼이 용서할 수 있는 전략인 팃포탯(Tit-for-Tat)이 가장 성공적인 전략이기 때문이다.진화인류학자 브라이언 헤어의 저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 따르면 협력과 친밀함이 진화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라는 등의 과학적 근거도 충분히 언급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사실 그냥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사랑이 얼마나 좋은지를. 또한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사랑으로 지탱되고 있는지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 작전과 무시로 일관하는 대응은 증오의 전염을 막지 못했기에, 이제 남은 방법은 하염없이 미련해 보이는 두 글자, 사랑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따라서 감히 말하건대 모두가 이따금 꿈꾸곤 할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세계를…2023년 자메즈는 2집 <The pink album>의 후속편 격으로 3집 <더 찐한 핑크 앨범>을 발매한다. 노랫말 속에 담긴 사랑의 농도가 더욱 깊어진 것으로 보아 그의 생각은 견고해지기만 한 듯하다. 가족, 친구, 연인, 스스로, 심지어는 세상까지도 사랑하려 노력하는 그는 수록곡 <n 3A07 ! " os>의 말미에서 이렇게 전한다.'자존심, 동정심, 두려움, 오만과 편견, 과거의 트라우마, 입에 차마 담기조차 힘든 욕설, 오해와 진실, 거짓말 섞인 변명, 다 뒤로 하고 입 밖에 튀어나올 건, 이 말밖에 없어' 그 말이 무엇인지는 어느 날 우연히 제목을 뒤집어 본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2024-12-09 05:00:00젊은의사칼럼

멈춤 속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시작

[메디칼타임즈=성균관의대 2학년 정소예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한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을. 학교를 다니지 않는 지금, 오히려 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 '멈춤'이 커다란 불안과 두려움으로 다가왔지만, 그 시간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위한 소중한 준비 기간이 되었다. 때로는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넓은 세상을 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처음 학교에 줄기세포 연구실 문을 두드렸던 순간이 떠오른다. 연구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이곳에서의 시간은 기초의학에 대한 존중뿐만 아니라 내게 잊지 못할 특별한 깨달음을 주었다. 강의실에서 스쳐 지나갔던 H/E 슬라이드와 Western blot 결과들이, 이곳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단순한 '데이터'로만 보였던 것들이, 실은 연구자들의 수개월에 걸친 땀과 노력의 결실이었음을 깨달았다. 피펫 하나를 다루는 것부터 시작해, 세포를 배양하고, 동물실험을 참관하고, 실험 결과를 기다리는 매 순간이 설레는 도전이자 새로운 배움이었다. 이 모든 과정은 교과서만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실험실에서 배운 것은 단순한 실험 기술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실험을 끝없이 반복하면서, 나는 '인내'의 진정한 의미를 배웠다. 피펫팅 하나, 세포 배양 하나에도 정교한 준비와 집중력이 필요했고, 매번 다르게 나타나는 결과 앞에서 좌절을 이겨내는 법을 알게 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실험은 때로는 마치 마라톤과도 같았다.데이터가 나오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어도, 다음 날 다시 같은 자리에 서는 것. 처음에는 단순한 반복처럼 보였던 이 과정이, 사실은 연구자로서의 근성을 키워가는 시간이었다.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평범해 보이는 진리가, 실험실이라는 작은 우주에서는 가장 중요한 생존법이었다. 그리고 이런 집요한 도전 끝에 얻어낸 작은 성공의 기쁨은, 그 어떤 순간보다 더 값진 것이었다.연구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던 도중 우연히도 AI 수업을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의료 분야에 AI를 접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수업이 진행될수록 가능성에 점점 매료되어갔다. 매주 새로운 분야에서 AI가 혁신을 일으키는 사례들을 배우면서, 미래 의료가 더욱 선명하게 그려졌다.영상 진단의 정확도를 높이고, 개인에게 맞춤화된 치료를 제공하며, 의료 서비스의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일. 이 모든 것이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낯설기만 하던 코딩도, 조금씩 부딪히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져 갔다. 작은 코드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느끼는 성취감은, 실험실에서 의미 있는 데이터를 얻었을 때의 그것과 닮아있었다.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마주한 분야가 이제는 내 미래를 그리는 새로운 나침반이 되었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길이 우리를 더 흥미진진한 곳으로 이끌어주고는 한다.새로운 배움과 발견은 언제나 즐겁지만, 나의 생각을 공유하고 나누는 것이야 말로 가장 즐거운 경험이다. 휴학을 하고나서 동기들과 만나기 어려워지고 고립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조금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려와는 달리 많은 선배님들, 그리고 다른 의대생들과 이토록 다양한 교류를 나누었던 적은 올해가 처음이다.'투비닥터'로 활동하면서 감사하게도 좋은 기회로 다양한 선배 의사분들을 뵐 수 있었고,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선배님들의 모습은 나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투비닥터 팀원들과 함께 여러 진로 관련 세미나를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새로운 관점과 아이디어를 접하기도 했다.무엇보다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고 내 관점이 담긴 기사가 매거진에 실리는 경험은 무척 뜻깊었다. 이를 통해 세상과 마주하고 소통하는 법을 배우며 나의 목소리를 확립해 나갈 수 있었다.지금 돌아보면, 모든 순간에는 이유가 있었다. 마치 퍼즐을 맞추듯, 각각의 경험들이 하나둘씩 연결되어 더 큰 그림을 만들어가고 있다. 실험실에서의 발견, AI를 공부하며 느끼는 설렘, 다양한 의료계 구성원들과의 만남까지. 이 모든 순간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때로는 정해진 길을 벗어나는 것이 두렵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다름'의 길에서 오히려 더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지금의 도전과 불확실성도, 언젠가는 빛나는 경험으로 기억될 것이다. 새로운 의료의 지평을 꿈꾸며, 오늘도 한 걸음씩 나아간다.
2024-12-02 05:00:00젊은의사칼럼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하여

[메디칼타임즈=경북의대 1학년 노정연 ]얼마 전 한국 문학의 경사와도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계 여성으로서 최초의 수상이며, 21세기 수상 작가 중 최연소로 이룬 쾌거이다.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은 곧장 대한민국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각종 서점 사이트에서는 접속량 초과로 인해 마치 티켓 예매 사이트처럼 접속 대기 순번이 부여되는 진귀한 현상이 발생했고, 항상 다음날 오던 택배는 며칠간 받아볼 수 없었다. 각종 서점에서는 한강 작가의 책을 구하기 위한 '오픈런'이 성행하기도 했다.본 적 없는 광경이 생경했지만, 불편하다거나 언짢은 감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마치 전 국민이 즐길 수 있는 축제가 열린 것 같았다.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독서 열풍'을 단지 '과시용 독서'에 지나지 않는다며 비판하는 목소리 또한 있었다. 몇몇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이를 풍자하는 방송까지 진행했을 정도이니, 결코 작은 목소리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과시용 독서'가 비판받아야 하는 주제일까? 정말로 본래의 목적이 뚜렷하지 못한 독서는 공허하기만 한 것일까?  비록 남에게 보여지기 위한 목적으로 독서를 시작하더라도, 책을 읽는 내 모습을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어떤 행동을 하는 스스로가 마음에 든다면, 자연스레 그 행동을 반복하게 될 확률이 올라간다. 처음의 목적이나 본심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닉 채터 교수의 저서 『생각한다는 착각』(김문주 옮김, 웨일북, 2021)의 표현을 빌려 설명하자면, '인간은 즉흥적인 경험으로 만들어질 뿐인' 것이다. 우리는 즉흥적인 경험을 내면화하여 이를 자신만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에 탁월한 동물이다.원래부터 쓰인 이야기 같은 것은 없으므로, 무언가를 고민하거나 주저하기보다는 이루고자 하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이야기를 새롭게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일 것이다.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기존의 틀을 깨고 그 바깥의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하는 일은 마치 높은 담장을 넘어가는 것처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가능하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긴 하나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일에 있어서도 독서는 아주 훌륭한 사다리가 되어준다.독서, 그 중에서도 문학 작품을 읽는 일은 그 자체로 새로운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통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지 위에 건설된 수많은 세상을 탐험하면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수많은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다른 시간대의, 다른 세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이야기는 원래부터 정해진 세계의 틀 같은 건 없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흔히들 세상은 이미 쓰인 이야기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또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성공적인 시나리오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 죽을힘을 다해서라도 이를 따라가야만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사회 전체에 퍼져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새로 쓰이고 있는 것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마치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수상 이후 그동안의 수많은 작품이 재조명되면서 '애초부터 예정되어 있던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처럼 말이다.당장 기존의 이야기를 모조리 부정하거나 바꾸는 일은 어렵겠지만, 적어도 '또 다른 이야기'에 대한 가능성을 잊지 말기를, 그리고 펜을 쥐고 이야기를 만들어 갈 작가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2024-11-25 05:30:00젊은의사칼럼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지 않게

[메디칼타임즈=충남의대 1학년 김태훈 ]출근 시간에 4호선 하행선 지하철을 타 본 적이 있는가? 상계, 노원, 수유, 미아, 길음에서부터 밀려오는 통근자들과 함께 섞여들어, 그들이 대부분 내리는 2호선 환승역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까지 겪는 숨 막히는 동행은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더군다나 길음역에서부터 동대문역까지의 4~5 정거장 동안 출입문이 열리는 방향은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으로 계속 번갈아 가며 바뀐다. 그 중간역에 내릴 수 있을지는 사람 사이를 지나다닐 수 있는 유연성과 양해를 구하는 목소리의 호소력에 달려 있다.당신의 종착지가 2호선에 있다면 군중과의 불편한 동행은 연장된다. 한 정거장, 두 정거장 지나칠 때마다 그날의 동행자들이 줄어드는 모습에 조금씩 숨통이 트인다. 운이 없는 날에는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앉지도 못한 채 아침부터 불쌍한 다리를 혹사한다.4호선을 주로 이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나의 불편함과 고통을 해소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자. 서울시의 교통 체계를 바꾸기는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왼쪽과 오른쪽이 번갈아 열리고 닫히는 출입문의 방향을 바꿀 수도 없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에게 이 상황을 알려보는 건 어떨까?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보며 개인 수준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분명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자신의 몸으로 불편함을 온전히 경험하는 것과 이를 간접적으로 접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끼리의 느슨한 공감은 가능하겠으나, 역시 충분한 이해는 어렵다.나는 김포골드라인 이용자들의 고통을 잘 모르고, 그들도 4호선의 고통을 잘 모른다. 그렇기에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알리고, 이러한 문제를 모르는 이들과의 소통해야 한다. 문제들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왜 그것이 문제이며, 왜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쌓아야 한다. 나와 똑같은, 혹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이들과 함께하며 목소리를 내야 한다.그렇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한계를 마주한다. 이 거대한 문제가 하루아침에 바뀔 리는 만무하다. 거대한 문제의 크기에 대비되는 작은 개인은 지속적으로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바뀌지도 않을 문제를 붙들고 나의 나약함을 계속해서 느낄 바에, 차라리 출근 시간에 4호선을 타지 않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일까?의학도로서 의대생들이 직면하고 있는 의료계 내의 문제점들이나 현 의정 갈등 상황도 그러하다. 학생 한 명이 할 수 있는 활동의 범위는 제한적이다. 바이탈과 기피 현상, 환자들의 서울 편중 현상, 높아지는 법적 리스크 등, 우리는 꼬일 대로 꼬여버린 상황에 처해있다.지난 상반기에 나는 나름대로 현 상황을 의대생의 입장에서 설명하기 위해 부대표를 맡고 있는 젊은 의사 비영리단체 투비닥터 내의 활동들에 참여했다. 관련 주제들을 다룬 단행본 제작이나 이주영 의원님을 모시고 의대생과 전공의들을 위한 토크 콘서트를 기획해보기도 했다.책을 쓰고, 행사를 기획하며 느낀 보람이라는 밀물이 빠진 후 나에게 남은 건 허탈감이었다. 이런 활동을 한다고 무엇이 바뀌었을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명쾌한 결과물을 얻지 못했던 것 같다. 여기서도 결국 한국 의료계를 떠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일까?시간이 지나고 학생에 불과한 내가 방대한 의료계에 대해서 고민하고 활동하는 것이 찻잔 속의 태풍은 아닐지, 그러한 활동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거대한 영향력을 끼치지 않았을 수는 있어도,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갔던 동료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봐주었던 적지 않은 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 않았을까?중요한 건 그 생각이 연속성 있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에게 남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남을 것'에 집중하니 끊임없이 피어오르던 허탈감이 점점 줄어들었다. 앞으로 우리는 스스로의 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된다. 동료들과 이어지고, 우리의 공동체가 어떤 방향성으로 가는 것이 옳을 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야 한다.각자의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고 상생할 수 있는 젊은 의사들의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면, 크나큰 문제 상황 앞에서 느껴지는 개인의 무력감도 덜어질 수 있다. 행사 한 번, 단행본 한 권에서 끝나지 않고, 서로가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동료들과의 협력을 통해 혼자서는 막막하던 일들이 조금씩 수월해질 수 있는 것이다.함께 하는 고민이 꼭 정책적인 주제일 필요는 없다. 창업에 관련된 것이든, 본인의 연구에 관련된 것이든, 더 나은 환경을 만드는 것에 있어서 젊은 의사들 사이의, 더 나아가 젊은 의사와 기성 의사들과의 연결이 필요하다.그게 가능한 의사들의 성장과 혁신, 연결의 생태계를 투비닥터와 함께 만들어가고자 한다. 의사들은 의료 분야 내의 핵심 주체로서 의료 시스템을 좋은 방향성으로 이끌어 갈 의무가 있다. 당사자로서 다양한 방법을 물색하고 더 나은 환경을 향해 나아가자.
2024-11-18 05:00:00젊은의사칼럼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메디칼타임즈=단국의대 3학년 박정은 ]휴학 나흘 전까지만 해도 나는 3일간 7개의 시험이 잡힌 살인적인 일정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 소아과학 시험을 치른 컴퓨터실을 빠져나와 내내 목에 걸려있던 숨을 삼켰다. 익숙한 대로라면 나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은 다음 경주 전 짧은 휴식과 성적표였다.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낯선 종류의 팽팽한 긴장감이 시험장을 나온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무거운 결정들이 빠르게 이뤄진 며칠 새에, 나의 역할도 실습을 기다리던 본3에서 의대생 단체 투비닥터의 TF 콘텐츠 공동 총괄로 바뀌어 있었다.TF에서는 급변하는 상황을 정리하고 사태와 관련된 배경지식을 담은 콘텐츠를 제작했다. 팀원들과 밤낮 구분 없이 매달려 매일 두 편 이상의 카드뉴스와 인터뷰 영상을 발행했다.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다량의 디지털 콘텐츠를 생산하는 경험은 매체의 극명한 한계를 눈앞에 펼쳐 보여줬다.제한된 분량 내에 깊이와 연속성을 담아내기 어렵다는 점. 너무 분명한 이 약점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여러 TF의 노력으로 사람들이 정보의 조각들을 손에 쥐었지만, 이를 연결하지 못하고 헤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문제가 펼쳐진 지형의 일부만을 더듬고 있는 듯해 답답하던 차였다.해결책은? 질문에 대한 답으로 책이 곧장 떠올랐다. 책은 다루는 주제의 흐름과 깊이를 친절하게 제공하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 독자의 머릿속에 그 줄기가 이식되어 있다. 또한 시기적절한 아날로그로의 회귀는 종종 사회에 큰 임팩트를 만들었고, 지금이 그 '때'라고 직감하며 기획 및 편집 총괄로서 <코드블루> 제작에 전념한 한 달 반의 여정을 시작했다.무지가 용기를 심는다고, 기획 단계에 착수하자마자 내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용맹한 척 가르릉거리는 아기호랑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심과 실행의 문턱을 넘자마자 문제들이 계속 날아왔다. 투비닥터 편집장으로서 세 권의 매거진을 만든 경력이 있지만, 같은 텍스트 매체임에도 책과 매거진의 무게는 엄연히 달랐다.첫 발짝인 내용 구성 기획부터 발목이 붙들렸다. 오랜 세월 누적된 문제들은 마치 얽힌 덩이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자 같았다. 책에 담을 주제를 하나 잡으면 다른 문제들까지 전부 딸려나왔다. 무엇을, 어느 깊이로 다룰지 결정하는 것부터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었다. 고심해 목차를 정하고 팀원들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거기까지가 얕은 언덕이었다.그 뒤의 시간들은 까마득한 산봉우리로 기억한다. 낮에는 400쪽 원고의 사실관계와 형식 오류를 뜯어보고 마감을 독촉하는 악덕 편집자 됐다가, 밤과 아침에는 낮시간의 내가 친히 씌운 마감의 쟁기를 이고 글을 쓰는 집필자가 되었다. 지킬 박사가 느꼈을 피로에 지극히 공감했다.그렇게 함께 고생해 완성한 책은 <코드블루>라는 제목을 가지고 독자들에게 전달됐다. 주변 이들의 찬평과 감사 인사가 탈진한 마음을 다시 부풀리는 얼떨떨한 감각을 경험하며 학교 밖, 전혀 새로운 트랙에서의 첫 번째 경주가 마무리됐다.이 사태는 마치 많은 사람이 아침마다 이용하는 도로 한복판에 통행 중단 표지판이 세워진 것과 같은 모습이다. 사람들은 등교하거나 출근할 수 없게 됐고, 이어지는 일상이 깨진 것은 물론이다. 갑작스런 상황에 누군가는 통행이 재개되길 기다리고, 우회로를 찾아 떠난 이도 있으며, 몇몇은 핸들의 커브를 돌려 본인조차 예상치 못한 경로를 탐색한다.나는 그 중 마지막 부류에 속해있다. 활자를 사랑하고 읽고 쓰는 일을 즐기지만 '2024년 4월, 책 발간'은 확실히 인생과 내가 사전에 협의하지 않은 일이었다. 어리둥절하고, 불안하고, 두려웠지만 새로운 경로는 감정의 요동에 보상하듯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느끼게 했다.이 경로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의학과 의료의 구분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이며, 정책, 제도, 사회 시스템 수립 과정에서 의사의 역할에 대해 제대로 고민하지 못한 채로 학교를 졸업했을 것이다. 이제라도 이 논제들을 마주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또 새로운 경로는 운전 규칙이 독특하다. 마음에 가치를 담을 것을 요구한다. 지난 이 년간 내 마음은 성적 따위의 숫자, 알파벳, 단기적 목표를 삼켜왔다. 하지만 책을 만드는 일은 다르다. 당위와 신념처럼 보이지 않는 가치를 선명히 추구해야 지속할 수 있었다.'내가 왜 책을 만들겠다고 했더라', 금세 증발해버리는 가치를 마음에 다시 가둬두기 위해 같은 질문을 묻고 또 물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의사의 사회적 역할, 미래의 의료 체계, 옳은 것과 그것을 추구하는 일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했고 나를 생각하게 했으며 더 풍성한 가치를 마음에 심게 했다.완벽한 답안을 작성하는 일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 그럼에도 건전한 사회를 고민한 노력 자체가 분명 의사의 프로페셔널리즘, 나아가 성숙하고 주체적인 사회인의 자양분이 될 것이라 믿으며 나는 오늘도 새로운 경로를 탐색한다.
2024-11-11 05:00:00젊은의사칼럼

실패할 자유, 고통받을 권리

[메디칼타임즈=고려의대 2학년 강지민 ]지난 여름 개봉한 영화 <탈주>에서 남한으로의 탈주를 감행하는 북한군 병사 규남(이제훈 분)은 그를 만류하는 상관 현상(구교환 분)에게 이렇게 말한다."실패는 할 수 있지 않갔습니까? 해보고 싶은 걸 하다 실패하고… 죽어도 내가 죽고… 살아도 내가 산다"쇼펜하우어는 일찍이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라고 말하며 고통의 불가피성을 주창한 바 있다. 발생학적으로도 인간은 태어나서 첫 숨을 내쉬는 그 순간부터 고통이 시작된다. 태아는 안온한 모체 속에서 탯줄을 통해 편안하게 산소를 공급받는다.그러나 출생을 기점으로, 양수로 가득 차 있던 태아의 폐는 양수를 밀어낸 후 허파 표면활성제에 의해 펴지게 되어 산소를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이어 병원균이 가득하고 따가운 외부의 공기를 만나 주체적으로 호흡하기 시작하는데, 첫 숨을 내쉬기까지의 지난한 고통을 방증하는 것이 바로 아기의 첫울음이다.비단 호흡뿐만이 아니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걷는 사람도, 평생토록 한 문제도 틀리지 않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필연적으로, 실패하고 좌절하며 때로는 방황하며 성장한다. 실패 없는 성공은 존재하지 않기에, 오히려 마음껏 실패할 수 있는 권리는 일종의 특권과도 같다.그러나 우리 사회는 점점 성공만을 종용한다.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정해진 삶의 '성공 공식'이 있다. 학생들에게는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높은 수준의 학업적 성취를 이룰 것이 요구되고 이는 곧 SKY로 위시되는 명문대, 혹은 의치한의 특수대학 진학으로 귀결된다.더 구체적으로는 '특정 학원을 다니며 특정 문제집을 풀어야 목표로 하는 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거나, '명문대 합격을 위해서는 고등학교 입학 전 대입 수준의 영어는 안정적인 1등급이 나와야한다'와 같이 세부적인 마스터플랜이 존재한다. 대학 진학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다.소위 '9대 스펙'(학벌, 학점, 토익, 어학연수, 자격증, 공모전 입상, 인턴경험, 사회봉사, NCS)이라는 말이 존재하듯 대학 재학 내내 수많은 스펙을 쌓아서 너무 늦지 않은 나이에 졸업하고, 대기업 혹은 공기업에 다니는 번듯한 사무직이 되어야 한다. 결혼과 출산을 비롯한 인생의 여러 과업 역시도 수행해야 하는 시기와 방법이 대략적으로 정해져 있다.'성공 공식'에 스스로를 맞춰나갈수록, 필연적으로 사람들은 실패를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점점 학부를 4년 만에 졸업하는 학생을 찾아보기 어려워지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일반대학의 학사학위취득 유예생은 2019년 1만3241명에서 겨우 2년만인 2021년도에 1만9016명으로 가파르게 증가하였다.4년제 대졸자의 평균 졸업 소요 기간도 남녀 모두 증가세에 있다. 학계는 그 이유를 어려워진 취업시장 여건에서 찾고 있다. 우리 사회는 성공 공식에서 벗어난 '공백'에 대해 박하다. 우리의 성공 공식에는 대학 졸업과 취직 사이에 비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대학 졸업 후 곧장 구직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단순히 쉬는 시간을 조금 가질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은 졸업 후의 공백이 구직에 악영향을 미친 경험이 있다고 말한다. 그 시간을 보낸 합당한 이유나, 이를 통해 무엇을 얻었는지를 면접 등에서 까다롭게 물어본다는 것이다.의과대학을 비롯한 전문대학(치과대학, 한의과대학, 약학대학, 수의과대학)의 입시 강세가 수년째 심화해만 가는 상황도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이과에는 의치한약수가 있다면, 문과에는 로스쿨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바로 전문직종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멀쩡히 졸업만 하면 라이센스가 주어지며, 어느 정도 안정적인 수입을 달성할 수 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점은 하방 소득이 높다는 점, 즉 실패할 가능성이 적다는 점이다.1995년 안철수 현 국회의원이 AhnLab을 창립하며 벤처 붐이 일어났다. 이어 여전히 국내 부동의 1위 포털사이트인 네이버의 소유주 NHN(창립자 이해진), 온라인 게임 '리니지'를 히트시킨 NC소프트(창립자 이택진) 등이 뒤를 이으며 90년대 한국에는 IT 벤처 신화가 펼쳐졌다.이들 기업은 IMF 사태를 극복하고, 이제는 더 이상 벤처기업이 아닌 국내 IT 시장을 주름잡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새천년이 밝았는데도, 이들을 뒤이을 벤처 신화는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는 구글의 탄생 이후에도 수많은 벤처기업이 탄생하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상황이다.물론 미국과 한국의 사례를 완벽히 동일한 시각에서 비교할 수는 없으나, 필자는 한국에서 창업이 상대적으로 고려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실패할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를 꼽고 싶다.대학 진학 중 페이스북을 설립한 마크 저커버그, 대학을 중퇴하고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한 빌 게이츠, 그리고 아예 대학 진학조차도 하지 않은 스티브 잡스의 신화가 2024년 대한민국에서도 가능할까?이러한 사회 풍조는 단순한 개인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실패하지 않을 것을 강요당하며 자란 아이들이 이제 부모가 되어, 바로 그들의 자녀에게도 실패하지 않을 것을 바란다는 점이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이들이 '꽃길'만 걸을 수 있도록, 위험 요소를 제거하려 적극적으로 나선다.모정이라면 모정이고 부정이라면 부정이겠으나, 안타깝게도 그 병폐가 점점 드러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해 서울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투신 사건으로 인해 초등학교의 민원 폭탄 실태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요즈음의 초등학교 모습은 올해 스물네 살인 필자가 경험했던 학교와 많이 다르다.'정서적 학대'라는 명목하에 초등학생들은 더 이상 나머지 공부도, 숙제도, 심지어는 칠판에 나가 문제 푸는 것조차 학생의 자신감을 깎는다는 민원이 들어와 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물론, 같은 반 친구들 앞에서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실수가 있었거나 손도 대지 못했다면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는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경험이 기폭제가 되어 수학 공부에 전념하게 될 수도 있으며, 문제를 직접 풀고 설명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학생에게 굉장히 훌륭한, 검증된 학습법이다. 실패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실패할 기회를 빼앗아버리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학생이 성장할 기회를 강탈하는, 또 다른 종류의 학대로 기능할 가능성도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기원전 1700년 수메르 점토판에도 '요즘 애들은 이상하다'는 내용이 담겨있듯이 세대 갈등은 인류의 오랜 논쟁거리이며 반복되는 역사이다.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특징적으로, 민원이 영유아를 상대하던 직종에서 초등학생, 이제는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주 고객인 직종에서까지 나오고 있다는 점은 단순히 어느 시대에나 있던 갈등으로 치부하고 가벼이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언젠가는 이 아이들이 우리 사회의 허리를 구성하고, 든든한 대들보로 기능해야 할 것이기 떄문이다.대한민국 사회는 유달리 패자에게 가혹하다. 한 번 낙오하면 다시는 주류에 편입하기 힘들고, 그 주류도 일관된 성공 공식을 따라가기에 바쁘며 남들보다 조금 더 공식에 부합한 사람이 되고자 경쟁한다. 바람직한 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큰 과제 중 하나가 '패자부활이 가능한 사회'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 속 신세계는 약물 '소마'를 통해 모든 구성원의 행복과 안녕을 추구한다. 그 누구도 힘들거나 아프지 않기에, 겉으로 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이 세계에 '야만인'이 들어오며 기존 구성원들과 충돌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야만인'은 고통받지 않는 신세계 속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고통받을 권리를 거세당했음을 지적한다.우리는 궁극적으로 누가 되어야 하는가? 고통은 그저 나쁘기만 하고, 제거되어야 하는 것인가? 점점 고통이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사회는, 과연 '야만인'이 살던 것보다 발전한 모습인가? 혹은 고통받지 않는 길을 위해, 스스로 마땅히 감내해야 할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동시에 이를 자양분 삼아 성장할 기회를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의문에 답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숙제일 것이다.
2024-11-04 05:00:00젊은의사칼럼

소리를 듣기 위해서

[메디칼타임즈=김승직 기자]2024년 개봉한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지금껏 홀로코스트를 다루어 왔던 수많은 영화와는 전혀 다르다. 1944년, 가장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는 그 어떤 격정적인 전투나 슬픔의 절규도 등장하지 않는다.전쟁하면 으레 떠올리기 마련인 폐허는 전혀 그려지지 않고, 오로지 아름다운 강변과 널찍한 정원, 수영복 차림으로 피크닉을 즐기는 단란한 한 가족의 일상이 이 영화를 지배할 뿐이다. 아이들의 귀여운 말썽이나 부부의 말다툼까지, 이 저택은 그들의 삶 그 자체다.영화의 역설적인 부자연스러움은 오로지 소리로만 들려온다. 나치 친위대 장교 루돌프 회스의 사저의 담장 너머, 아우슈비츠의 음산한 불협화음으로만.독재나 전쟁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들을 묘사하는 창작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들이 일상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정말 그것들이 끔찍한 이유는 그 안에서 삶이 여전히 연속되기 때문이다.세계 2차 대전 한복판에서도, 폭격을 당해도, 자연재해가 덮쳐와도 사람들은 그 안에서 저마다의 일상을 찾아내곤 한다.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추상적인 장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생활을 바꾸는 힘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오랜 역사 동안 늘 정치가 인류사의 중대한 화두였던 게 아닐까.나는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학부를 졸업했다. 학부 1학년 1학기 때 미국의 45대 대선이 치러졌다. 결과가 나온 날 학교에서 이런 이메일을 받았다. '선거 결과에 우울감 등을 느끼는 학생을 위해서 상담이 진행되고 있으니 필요한 학생은 신청하기를 바랍니다'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만큼 대선 결과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 시민권자조차 아니었던 어린 내게 정치는 남의 일이었다. 대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그들은 내게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구 반대편 높으신 분들의 권력 싸움이 내 삶에 미치는 여파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그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나는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미국에서는 시민권자가 아니었기에 그랬다는 핑계가 있었다면 의학전문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고 귀국한 후에는 그조차도 없었다. 졸업하자마자 팬데믹이 전 세계를 덮쳤고 보건의료 재난 상황에서 또다시 정부와 의료진들이 협력하고 갈등한다는 뉴스가 송출되는 와중에도 나는 대학원 수험을 해야 했다.면접을 준비하며 보건학도 역학도 조금씩 공부했지만 그렇다고 의료 현장이나 정치적 견해들이 피부로 와닿지는 않았다. 그런 주제가 면접에 출제된다는 건 분명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의료인을 사회가 원했다는 뜻이었을진대 아이러니한 일이다.의학전문대학원에 들어오고서는 매일매일 공부에 치여 사느라 안 그래도 크지 않던 관심이 거의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선거에는 참여했지만, 매번 신경 쓰기에는 피곤한 일이 바로 정치였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의대생과 의사들도 비슷했을 거라 추측한다.쏟아지는 공부에 피로에 지친 와중에 발표된 정책들을 알아보고 비판하는 일은 쓸모없고 피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외면해 왔던 대가가 결국 내 일상에까지 덮치고 만 것이다.역시 나치에 관한 유명한 시가 있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금언이다.나치가 공산주의자를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작금의 사태는 일견 이 시를 떠오르게 한다. 지금껏 내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했던 정치야말로 실은 내 일 그 자체였다는 귀중한 사실을 깨닫는 나날이다. 분명 누군가의 일상에 이미 넘실대고 있었을 파도가 이제는 나에게까지 온 것이다. 거기에 발을 적신 후에야 이 풍랑이 우리 모두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노라면 문득 부끄러움을 느끼고 만다.환자를, 생명을, 삶을 다루는 의학도로서 이토록 '사람'에 무지했다니. 기계적인 의술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보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현대 의학이라면, 인간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 또한 당연히 관심을 가지고 고찰해야 할 대상일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대란은 의료인들에게 이러한 중요성을 깨닫게 만들어 준 중대한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의 정원 너머, 비명을 가두어 둔 담장은 무엇이었을까. 시멘트와 콘크리트보다도 강고한 그것은 의료인들의 무관심인 동시에 예쁜 저택의 탈을 쓴 의료 시스템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겠다.의료인들이 벽 너머 정치를 외면해 온 것처럼 벽 밖의 사람들에게도 의료인들은 '일반적이지 않은', '설명하기에는 너무 바쁜' 소음이었을지도. 지금 이 순간마저도 수많은 언론과 그 뒤의 결정권자들이 대한민국 의료를 이해하지 못한 채 기사를 쏟아내고 있고 의료진들 역시 지금껏 외면해 온 소통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몰이해가 쌓아 온 공고한 간극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더디게나마 그 벽을 무너뜨릴 기회인 것은 아닐까.눈과 귀를 열고, 피와 살뿐만이 아닌 진짜 인간을 볼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으로, 의료인을 의료인으로 만들어 주는 가장 중요한 가치일 것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말해 주기를 바란다면 나 또한 누군가를 위해 말해야 한다. 나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지켜줄 수 있어야 한다.그러기 위한 첫걸음은 책에서 눈을 돌려 세상을 보는 것이다. 활자가 아닌 소리를 듣고 살아 숨쉬는 사람들을 느끼는 것이다. 바쁘고 피곤하고 복잡하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정치로부터 눈을 돌려왔다면 이제는 직면하도록 하자.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진정한 의미의 '소통'에 대해 고민하면서, 벽 너머 그저 성가신 소음이 아닌 그들의 진짜 목소리를 듣고 우리 또한 우리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는 법을 연습할 때다. 그 첫 단계는 적극적으로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뉴스를 보고 꾸준히 의견을 개진하고 우리와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우리를 이해시키는 만큼 우리 또한 그들을 이해할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괴로운 시기지만 어쩌면 세상 밖으로 나와 스스로를 환기할 기회일지도 모르는 이 시간을, 내가 몸담은 사회와의 연결점을 새로이 만드는 데 사용하고 싶다. 그리하여 우리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의 경계가 무너지면 비로소 우리는 진정 사람을 보는 의사라고 스스로를 부를 수 있으리라. 사람을 보기 위해서. 소음이 아닌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2024-10-28 05:00:00젊은의사칼럼

한여름 밤의 꿈

[메디칼타임즈=순천향의대 3학년 오명인 ]햇빛이 따갑고 찌는 듯이 덥던 8월 첫째 주, 나를 포함한 10명의 자원봉사자가 정동 초등학교 운동장에 도착했다. 정동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50명 정도 되는 작은 초등학교로, 운동장에서 지평선을 바라보면 기차가 논을 가로지르는 것이 보이고, 뒷문으로 나가 조금만 걸으면 정동진 해수욕장이 펼쳐지는 곳이다.이틀 뒤면 이곳에서 2박 3일간 정동진 독립영화제가 열리게 된다. 4년 전, 예과 1학년이었던 스무 살의 나는 학교를 이 주간 빼먹고 부산국제영화제의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스무 살 시절의 그 경험은 대단한 일이 아닌데도 왜 이렇게 선명하게 남아 추억하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 기억 때문에 휴학 동안 바다와 가까이서 열리는 영화 축제에서 다시 일하고 싶었다.하지만 '바닷가 초등학교에서 열리는 한여름의 영화제'라는 낭만적인 이름 뒤에 '높은 업무 강도로 유명한 영화제'라는 부제가 있다는 것을,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알았다. 도착하자마자 트럭에서 짐을 내리고, 강당에 책상을 깔고, 입구에 플래카드를 달았다.폭염 경보가 떨어진 날이라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땀을 식히기 위해 잠시 그늘에 서서 운동장에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내일이면 운동장이 관객으로 꽉 차고 저 스크린에 영화가 맺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다음 날, 해가 기울고 땅의 열기가 조금 식자 관객분들은 간식거리와 모기장을 들고 입장 몇 시간 전부터 줄을 서기 시작했다. 우리는 입장 준비에 속도를 붙였다. 영화제가 시작하기 십 분 전, 자원봉사자들이 입구에 모였다. 팀장님이 구호를 외쳤다."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 정동진 독립 영화제 파이팅!"관객들이 박수를 쳐줬고, 드디어 영화제가 시작했다. 나는 붕 뜨는 마음으로 내 자리로 뛰어갔다. 입구 조 자원봉사자들이 뿌린 비눗방울이 8월의 노을에 반짝였고, 그 사이로 관객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부스에서는 강원도 지역 커피와 맥주를 팔았다.모기를 쫓기 위해 피우는 쑥불 향과 개막공연을 맡은 킹스턴 루디스카의 음악 덕에 축제 분위기가 나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별이 뜨자 모두 앉아 영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정말 다양한 관객들이 정동진을 찾았다.연인들과 가족들, 손녀와 함께 온 할머니, 강아지와 함께 온 관객도 있었다. 그 관객들이 영화를 보며 웃고, 우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자 왜 다시 영화제에서 일하고 싶었는지 떠올랐다.저마다의 시간대를 살던 사람들이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시간대를 완전히 공유하는 마법 같은 순간, 각자 받은 감동을 얼굴에 감추지 못하고 영화관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퇴출구에서 바라보는 것, 감동과 행복이 가득한 축제를 내가 만들어 간다는 성취감, 나는 이것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다.잘 마무리될 것 같던 영화제는 마지막 날에 위기를 맞았다. 일기예보에서 분명 약간의 비만 내린다고 했는데, 빗방울이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더니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퍼붓기 시작했다.결국, 영화제 역사상 십 년 만에 실내 상영이 확정되었고, 그와 동시에 봉사자들의 업무는 180도 바뀌었다. 체육관 안에 의자와 방석을 깔고, 관객분들을 인솔해서 한 분씩 들여보내고, 비로 초토화된 외부를 정리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모두 우비를 입은 보람도 없이 쫄딱 젖어 있었고 신발은 젖다 못해 물이 찰랑찰랑 차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런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나를 사로잡은 영화 하나가 있었다. <건축가A>라는 의뢰인의 과거와 추억을 재료로 집을 지어주는 건축가의 이야기를 담은 애니메이션 영화였다. 나는 출입문 옆에 서서 상영시간 25분 동안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몰입했다.빛나는 내용이 꼭 맞는 그릇에 담겼을 때 선사하는 은은한 감동이 느껴졌다. 동시에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을 갑자기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에도 비는 멈출 새를 모르고 내렸다.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행사가 마무리되자 새벽 5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지친 몸과 젖은 신발을 끌며 숙소로 돌아가는 중, <건축가A> 감독님이 옆에서 나란히 걷고 계신다는 것을 눈치챘다. 나는 심호흡을 두 번 하고 말을 걸었다."저기, 감독님 영화 너무너무 좋았어요…!"영화를 보면서 예상한 것이 맞았다. 감독님은 작품만큼 따뜻하고 쾌활하셨다. 감독님과 같은 방향으로 걸으며 대화를 좀 더 이어가다 "사실 저도 이런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꿈이었는데…" 라는 오래 묵은 내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그 순간 왜 내가 <건축가A>에 더 빠져들었는지 깨달았다. <건축가A>가 내가 영화와 그림으로 만들어 보이고 싶었던 꿈같은 작품 같았기 때문이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닌데 내가 혹시 가볍게 생각했다고 보일까 봐 순간 걱정이 들었다.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감독님은 여전히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하셨다."왜요? 하면 되죠!"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분이 가볍고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하시는 모습에 안심했다. 10대의 나는 영화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매일같이 떠올랐다. 어떤 이야기는 나만이 할 수 있다고 믿던 때도 있었다.그러나 내가 만들고 싶은 것과,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의 괴리는 하루하루 커져만 갔다. 그리고 절대로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 창작자의 괴리는 세기의 천재들도 모두 느낀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런 핑계를 대는 것이 부끄럽지만, 평생 그 깊은 골을 바라보면서 쓰고 그리고 실패하는 길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중학교 졸업이 가까워져 오자 나는 내가 더 잘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하고 의대 진학을 목표로 두고 공부를 시작했다. 다행인 점은 지금의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어린 나를 그리워하면서도 아주 다른 길을 가는 지금의 나를 동정하지 않는다.감독님은 애니메이터들에게 의사가 너무 필요하다, 우리 좀 잘 봐달라고 농담을 던지셨고, 나는 "후속작 기다릴게요!"를 마지막 인사에 덧붙였다. 인사를 할 때 쯤에는 이미 동이 틀만큼 주변이 밝아져 있었다. 저기 해변에 함께 일주일을 동고동락하며 영화제를 만들어간 친구들이 일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여 그쪽으로 뛰어갔다.사실 꾸준한 소비자도 아니면서 봉사자가 되면 왠지 영화계에 발가락이라도 담근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찾아오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가 영화를 만들지는 못할지언정, 누구에게나 영화 같은 순간은 찾아온다. 정동진 영화제가 내게 남긴 몇 가지 명장면처럼 말이다.이를테면, 비눗방울 사이로 활짝 웃은 웰시코기가 입장하는 것을 본 순간이나, 감명 깊게 본 영화의 감독과 새벽에 숙소로 돌아가며 대화를 나눈 순간이나, 잠 한숨 자지 않고 쫄딱 젖은 상태로 동트는 것을 보자고 모였으나, 구름 때문에 정작 일출은 보지 못하고 남이 태우는 불꽃놀이만 함께 보며 영화라는 이름으로 다시 마주치자고 약속했던 순간 같은 것이다.
2024-10-21 05:00:00젊은의사칼럼

비밀의 언덕 이야기

[메디칼타임즈=단국의대 1학년 유우선 ]당신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글을 쓴 적이 있는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글'. 실상, 우리가 쓰는 모든 갈래의 글이 여기 해당한다. 일기는 당신이 어떤 일상을 살아가는지 보여주고, 감상문은 당신이 가진 미학적 취향을 담고 있으며, 논설문은 당신의 눈을 통해 보는 사회를 비춘다. 글은 자기표현을 하는 데에 무엇보다 적격인 매체이다. 그래서 2024 의료대란 한복판을 지나는 우리에게 글은, 다시 말해 자기표현은 더욱 어렵다. 현시점의 우리는 보다 넓은 세상에 목소리를 내야 할 필요가 있다. 사회에서 마주하는 모든 사람은 현재 의료계에 대한 설명과 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공유하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입을 꾹 다물고 있을 필요도 있다.이 난세(亂世)에는 너무나 많은 집단과 이해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의 표현은 자칫 불특정 다수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고, 역풍이 되어 우리 스스로에게 내상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우리'에 대한 표현을 해야 하는 것인가?이 딜레마 앞에 황망히 서 있을 당신에게, 최근 내가 '글'과 지난하게 대립한 경험을 공유한다.글은 언제나 나에게 감정 표현의 도구이자 친우였다. 힘든 일이 있으면 일기를 썼고, 아끼는 사람이 생기면 편지로 마음을 전했으며, 지루한 날이면 감상문을 씀으로써 권태를 깼다. 그렇게 손 잡고 나란히 인생길을 걸어가던 글이, 최근 들어 내게 마른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갑자기 글쓰기가 힘이 들었다. 유려한 문장이 아닌 그저 단어의 나열만 노트북 화면에 떠다녔다. 겨우 한 편을 완성해도 다시 읽어보면 세상 밖으로 내놓을 수는 없는 끄적임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오래 고전하고 있었다.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 글 너머의 '나'를 너무나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휴학을 시작한 2월부터 지금까지, 교내 비상대책위원회 콘텐츠, 투비닥터 2024 의료대란 책자 <코드블루>, 다양한 교내외 소식지 칼럼 등, 다양한 형태의 글을 꾸준히 써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내 글이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글을 쓰다가 문득 첫 문장으로 돌아가 보면 당황스러울 정도로 낯선 나를 내 글 속에서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했던가, 하고 곱씹어 보는 시간이 쓰는 시간보다 늘어갔다.많은 사람이 읽을 글에 나조차 어색하게 느끼는 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꺼려졌다. 무엇보다 싫었던 것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 모습까지 글에서 감출 수 없다는 것이다.스스로에게조차 숨기고 싶은 생각,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감정들은 글에 녹아 거울처럼 나를 비추었다. '나를 표현한다'는 점은 내가 글을 사랑했던 가장 큰 이유였지만, 이제 맹점이 되어 내 글쓰기의 혈을 틀어막았다.둘째로, 완성된 내 글이 어디에, 어떻게 닿을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 글은 나에게 감정 표현의 수단이었다. 그래서 내 글은 지극히 가벼웠으며, 또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2024 의료대란은 내게 글의 결을 고를 때가 되었음을 알렸다.투비닥터 홈페이지에, 메디칼타임즈 칼럼 기고란에, 교내 소식지의 회고 에세이란이라는 특수하고 엄중한 자리가 주어진 것이다. 내 글은 이제 그저 내 감정을 담고 어딘가로 휘발되는 존재가 아니라, 무게를 가지고 누군가의 가슴속에, 혹은 혼란한 세상에 내려앉아야 하는 존재였다.이를 인지하는 것은 내가 한낱 학생 기자이고 아마추어 칼럼니스트라 할지라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이었다. 현상 이상의 것을 보고, 사회에 전달하는 바가 통찰력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무게를 갖기에 나는 너무 무능력하고 겁이 많았다. 욕심이 커져도 대단한 글이 아니라 계속 껍데기만 찍어내는 나만 발견했다. 사회적인 글로 도약하지 못하는 내 펜에 힘이 빠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했을 때, 나는 자문했다. 그러면 이제 무슨 글을 써야 하지? 내가 원하는 글은 어떻게 만들어내야 하지? 답을 찾지 못하고 같은 질문만 거듭하다가, 나는 문득 이 고해나 다름없는 칼럼을 제법 편안하게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글쓰기가 더럽게 안 풀린다는 나의 한심한 고민과, 의료대란의 당사자임에도 어떠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자책이 담긴 이 칼럼은 앞서 말한 나의 두 가지 문제들을 직면하고 있는 글이었다. 스스로의 모자란 모습도 부정하지 않고 드러내고, 사회에 어설프게나마 학생 기자의 무력감을 소리치는 글. 그제야 나는 내가 중요한 선후를 바꾸어 생각했음을 깨달았다.내 고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가 쓸 글'이 아니라 '글이 담을 나'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 글에 나타나는 내가 낯설고 창피하다면 우선 그 모습을 받아들이고 단단한 나를 만들기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회로 띄워 보낼 목소리에 자신이 없다면 더 배우고 경험하며 원색적인 주장이 아닌 통찰력 있는 의견을 만들어 낼 힘을 길러야 한다.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모든 과정과 결과 속에서의 '나'를 표현할 솔직함이 필요한 것이다. 그 용기 없이 쓰는 글은 텅 비어갈 수밖에 없다.당신과 나의 앞에 놓인 딜레마로 다시 돌아가 보자. 당신은 현 의료대란 사태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강하게 피력할 만한 합리적인 논리와 통찰력 있는 의견이 있는가? 동시에, 그 표현이 타인을 무분별하게 상처입히지 않을 성숙함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 표현에서 드러난 스스로를 인정하는 솔직함을 가졌는가?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세상에 드러내는 데에 있어 이와 같은 질문들을 다시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 고민에서 나오는 해답이 현 의료계에 어스름히 깔려있는 '자기표현'의 딜레마 해결에 도움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위의 경험을 통해 내가 찾은 해답은, '내가 쓰고 싶은 좋은 글'이다. 글 너머에 있는 나의 색이 괴이할지라도 선명하게 보이는 글, 세상의 어두운 틈새에 불편하게 끼어들어 가더라도 솔직한 파장을 일으키는 글을 쓰고 싶다.그를 위해 당당하게 행동하고 감정에 꾸밈없어 지리라. 세상을 진지하게 직면하고 두려움 없이 발언하리라. 좋은 글을 위해, 그런 좋은 내가 되어가려 한다.영화 <비밀의 언덕>에서, 주인공 소녀 '명은'은 부족함 없는 아이로 보이고 싶어 거짓으로 쓴 글을 교내 글쓰기 대회에 제출한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거짓된 글과 진실된 글들이 차례로 '명은'의 삶에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변화의 막바지에서 '명은'은 자신의 가장 숨기고픈 모습이 담긴 원고지를 몰래 언덕에 묻는 것으로 어떤 글을 쓸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간접적으로 선택한다.우리 손에도 앞으로 많은 원고지가 들릴 것이다. 그 원고지에는 때로는 부끄러운 나만의 진실이, 때로는 적나라한 견해가 담겨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든, 우리에게는 원고지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원고지 속 '나'를 드러낼 필요가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외려 비밀의 언덕에 원고지를 묻어버린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하는 솔직함이 필요하다. 그것은 괴랄한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지. 그러나 긴 딜레마를 지나 치열하게 해답을 찾아낸 우리가 쓸 글이라면, 그 글은 결국 우리를 가장 우리답게, 읽는 이들을 가장 감각하게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24-10-14 05:00:00젊은의사칼럼

뉴노멀을 맞이하며

[메디칼타임즈=연세의대 4학년 박태웅 ]올해는 겨울을 지내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순간이 썩 즐겁지 않았다. 눈이 소복이 쌓인 외상센터를 뒤로한 채 자취방으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는 건, 파국(波局)이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새로운 세상에 던져졌다. 사람들이 남긴 댓글은 비수가 되어 날아왔고, 학생들은 이기심이라는 프레임 속에 갇혀 짓눌렸다.분명 가운을 입고 실습하고 있었을 노릇인데, 거리를 걸으면서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주눅 드는 상황. 현실감이 없었다. 친구들과 동생들은 매일 불안에 떨며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그저 어두운 터널을 걸어가는 마음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책임지고 싶었다. 2020년을 겪었던 사람으로서, 본과 4학년 선배로서, 공동체에 많은 애정을 쏟았던 사람으로서, 마땅한 도리를 다하고 싶었다.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받는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비상시국 대책위원회(이하 비시대위)가 설립되었다는 소식에 곧바로 지원했다. 능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최선을 다했다.팀원으로, 팀장으로, 본부장으로, 직급이 한 단계씩 높아졌다. 체계를 개편했다. 더 많은 이들에게 진실을 알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다른 의과대학 비시대위들을 찾아 나섰다. 함께 나아가자고 외쳤고,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하자고 말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중, 어느새 옷장에서 반소매를 꺼내입는 날씨가 찾아왔다.사태 이후 몇 달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쉬지 않고 노력했다. 많은 아이디어를 제시했지만, 모두 실현되지 못한 채 좌절되었다. 현실은 잔혹했다. 한낱 학생들의 마음만으로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기엔 벽은 너무나 크고 단단했다. 20대 청년들의 무력감과 고통은 한낱 어리광으로 치부됐다.이 복잡하고도 심오한 문제를 푸는 과정에 조금이나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청년은 아마 의대협과 대전협의 임원진들, 그중에서도 지금 상황에 자신을 온전히 내던질 수 있는 사람들 정도에 불과했다. 많은 이들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단 자신의 안위를 챙기기에 급급했다. 우리에게 그들을 손가락질할 자격은 없었다.많은 의대생에게 그렇듯, 나에게도 무력감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노력만으로는 변화시킬 수 없는 무언가를 처음 마주한 이후로, 몸에서 의지가 눈 깜짝할 새에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버거워 천장을 마냥 바라보는, 그런 아침들이 늘어갔다.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서울의 여러 공원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웃음소리와 함께 천천히 늘어지는 강물을 들여다보면, 잠시나마 마음의 물결이 가라앉는 듯했다. 우연한 기회로 이주영 의원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워낙 열심히 활동하시기도 하고, 말을 참 잘하신다는 소문에 홀린 듯 찾아갔다. 무언가 통찰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좌석에 앉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청중에게 "당장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박민수와 이주영의 이름이 절대 나오지 않도록 삶에서 지워버려라"고 말했다.더욱 관심을 가지고 거리로 나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동자가 흔들렸다. 일단 여러분이 살아야 한다, 그래야 뒤를 생각할 수 있다는 그녀의 이야기, 백 번이고 맞는 말이었다. 언제까지고 무력감과 분노라는 핑계 뒤에 숨어 올해를 보낼 수는 없었다. 큰 울림을 느꼈다.이날의 충격은 2월부터 7월까지의 경험과 맞닿아, 하나의 방향을 이루었다. 덕분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뉴노멀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따위의 고민에 대한 답 또한 명쾌히 내릴 수 있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내린 답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참 가슴 아픈 말이지만, 답답함이라는 감정에 매몰될 시기는 이미 지나버렸다. 우리가 아파하는 와중에도 법안들은 턱턱 통과되었고, 화를 잔뜩 내며 뉴스를 보더라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이제 우리에겐 두 가지 삶이 남았다.하나는 현 사태와 관련된 모든 뉴스, 커뮤니티, 기사를 끊어버리고 여행도 다니면서 지금껏 하고 싶었던 많은 것들을 즐기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어떻게든 찾아 발악하는 삶이다.나는 원래 성정이 그러하듯 후자를 골랐지만, 무력함에 잠식될 바에 차라리 추억을 쌓고 행복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 낫다는 말에는 백번 동의한다. 뉴노멀은 필연적이다. 의정 갈등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우리 모두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정부, 국민, 의사 그 어떤 집단도 승리할 수 없는 상황이 왔고, 의정 갈등은 누가 덜 쓰라린 상처를 안고 돌아가냐의 싸움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휴학 승인조차 그렇다. 승인된다면 물론 학생들의 안전은 보장되겠지만, 전공의의 복귀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지옥이 기다리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결국 휴학 승인, 원점 재논의, 그런 것들보다 더 먼 곳을 바라봐야 한다.'필수의료패키지'에 화를 내기보단 그 결과물이 왜 등장했는지에 대한 맥락을 알아보고, 언론의 악마화에 질색하기보단 거부감 없이 착착 진행되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어떻게 하면 시민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 의사들은 사회의 엘리트로서 무엇을 제시할 수 있을지, 이제 우리는 의대를 다니며 좀처럼 고민하지 않았던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우리는 의대 공동체 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어떤 이는 공부에 몰두하며, 다른 이는 연구에 몰두하며, 또 누구는 동아리에 몰두하며 저만의 생활을 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성숙해지는 것은 사실이나, 비슷한 사람들과만 교류하는 삶에 지나치게 익숙해진다.나와 아예 다른 삶의 궤적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한다. 이런 환경에서의 경험이 계속해서 누적되면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도, 다른 이를 이해하는 것도 어렵다.기존의 사고방식을 잠시 내려놓자. 예전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같은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시민들은 의료 현실을 알지 못한다, 의사들이 돈 많이 버는 게 배 아파서 돌을 던지는 거다.'. 흔히 보이는 이런 문장들, 이들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담론의 연장선을 그리지 말고 본질에 다가가자.고민하는 것은 어렵다. 앞서 던졌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더욱 어렵다. 어떻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우리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는 것이 그 열쇠라고 생각한다. 의대 내에서도 사람들의 삶은 제각각이지만, 다양한 진로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매력적이다.삶의 한순간에서 그들의 궤적과 당신의 궤적이 맞닿고, 전혀 알지 못했던 세상을 눈으로 바라보는 장면을 떠올리자. 약간의 기대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가? 발을 내디뎌 그 궤적들을 마주할 때 비로소 나를 알게 되고, 고민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자부심과 안정감을 주었던 의대 공동체에서 잠시 벗어나자.봉사, 동아리, 대외 활동, 운동, 어떤 것이라도 좋다. 정 여의찮다면, 의대 내에서라도 내가 하지 않았던 것들을 도전해 보자. 새로운 환경에서 추억을 쌓으며 고민과 질문들을 이어 나가면 어느샌가 유의미한 지점에 닿는다.비틀어 바라보자. 골몰하고 도전하자. 
2024-10-07 05:00:00젊은의사칼럼

허무의 너머에는

[메디칼타임즈=인제의대 3학년 김성재 ]나는 지난 8개월간 현 사태에 대한 카드뉴스와 영상을 제작하거나 경험을 위해 인턴 생활을 하는 등, 대의와 실리 어느 쪽도 놓치지 않고 슬기로운 휴학 생활을 보내고 있다고 자신했었다.젊은 의사들을 위로하자는 취지의 행사를 주최하고 성황리에 마무리한 다음 날 오후 어머니의 울음 섞인 절규에 잠이 깨기 전까지는 말이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외할머니께서 림프종을 진단받으신 지 고작 2주 만이었다.그 후 당신의 육신이 불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날짜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경황없는 3일이었다. 기억나는 장면은 입관할 때 5살 어린이처럼 엄마를 하염없이 불러대는 나의 엄마와 술에 취해 바닥에 주먹을 내리꽂는 고인의 부군, 그리고 이름 모를 울부짖음."집에 가고 싶다 캤는데, 김치 성그는 거 알려준다 캤는데. 이제 우리 엄마 못 보잖아. 엄마 못 보내겠다, 엄마, 엄마…"그래서 내가 얼마나 무너졌었는지, 림프종이 호지킨성이었는지, 당신의 별세와 의료대란이 어떤 관계였는지 따위의 무의미한 주제들은 제쳐두자.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튼튼하게 축조했다고 믿었으나 가장 필요한 순간에 어떤 위로의 말도 만들지 못하는 나의 철학, 그리고 본과 내내 만들었으나 두 달 전 정형외과를 방문하셨을 적 신생물이란 의심을 던지지 못했던 나의 스키마에 대한 것이다.혹은 수많은 이들이 발버둥 쳤음에도 나아진 게 없어 보이는 뉴스 속 이야기들에 대한 것이고, 피해 갈 수 없는 죽음, 불합리한 사회, 온갖 사사로운 감정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의료계의 역사에서 난세(亂世)라고 구전될 갑진년의 의료대란 속에서도, 단 하나의 읍소조차 통하지 않는 판국에 우리 대부분이 느꼈을 감각은 분노 혹은 그것이 타버린 후 남은 무력감과 죄책감이 아니었을까.우리는 보통 위대한 철학자도, 우수한 의사도, 난세의 영웅도 아닐 테니, 누군가에게는 자그마할지 모르는 바람에 꺾이곤 하며 거대한 힘 앞에 좌절하기도 한다. 시련 앞에 무너지는 것은 인간이라면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종종 마주하게 되지만 반성의 시간은 너무 짧아서도 길어서도 안 되는 법.이를 극복하는 방안은 개인마다 다양하다. 고통을 발전에 대한 의지로 승화하는 이들이 있는 한편 술과 담배로 자해하며 잊는 것도 하나의 기술이다. 누구나 각자의 병법서가 있겠지만 후술할 전략은 최후의 보루임과 동시에 내가 즐겨 쓰는 방법으로, 이미 많은 시도를 해보았으나 여전히 늪에서 헤매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고 참고하였으면 하는 마음에 기록해 두는 것이다.그것은 바로 좌절이 본인을 온전히 잠식하도록 몸을 내어주는 것이다. 삶의 불합리와 불규칙성을 온몸으로 느끼고, 나는 어떤 일을 행했는지, 세상은 어떻게 움직였는지 모두 잘근잘근 분석하고 자책하라.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죽기 직전에야 삶의 반짝임을 보았듯 밑바닥에서야 비로소 보이게 되는 경치는, 무질서한 세계 가운데 한마리 포유류에 불과한 나의 존재.비관적인 문장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그저 작동할 뿐인 세계는 분명 무의미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내가 부여하는 것만이 내 삶의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적나라한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불완전한 스스로를 정밀하게 인식한 후에야 진정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가 보이게 된다. 한없이 부족한 나이기에 원하는 색채만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이 궁극의 자유를 인지한다면 도대체 어떤 것이 당신에게 무력감을 선사하고, 당신을 죄로 속박할 수 있겠는가?의료대란의 끝은 보이지 않을지라도, 죽음은 피할 수 없을지라도, 사람의 감정은 통제할 수 없을지라도, 아름답게 엉성한 이 장소에서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만이 의미이자 행복의 전부인데 말이다.밑바닥에서야 비로소 보이던 경치는 허무 끝에 주어진 자유를 통해 무한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의 존재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관성에 몸을 맡긴 채 허무의 바다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니체는 고통으로 얼룩진 생에서 영원회귀의 개념을 제시하며 '이 삶이 영원히 반복될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세계에 던졌다. 나는 허무주의의 심연에 빠져 삶을 증오할 바에는 수없이 반복할지라도 즐거울 수 있는 숙명을 찾아 내일 죽어도 좋을 정도로 충실하게 살아가겠다.그러므로 오늘도 나를 지탱하고 남은 생명을 부싯돌 삼아 불합리함에 저항의 불꽃을 던질 것이다. 닿지 않더라도 좋다. 그게 아니라면 남은 선택지는 비관의 절벽으로 낙하하는 것밖에 남지 않으므로.
2024-09-30 05:00:00젊은의사칼럼

"이런 사람들이 의사가 되어야 하는데"

[메디칼타임즈=성균관의대 2학년 정소예 ]휴학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동안 봉사활동에 전념했다. 동네 주민센터의 민원봉사부터 도서관 서가 정리, 플로깅 봉사, 지역아동센터 일일봉사, 병원 안내 봉사, 그리고 명동 가톨릭회관에서의 사무봉사까지 봉사활동이라면 가리지 않고 하루종일 찾아 나섰다.처음에는 갑자기 주어진 빈 시간을 채워야겠다는 약간의 강박과 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봉사를 하면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일화들도 여럿 있었다.병원에서 안내를 도와주는 봉사를 하며 내원객들과 나눴던 대화들이 떠오른다. 병원에서 나는 아주 간단한 일을 맡았다. 그저 지정된 구역에서 키오스크 사용에 어려움이 있는 내원객들을 돕거나 간혹 길을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방향을 가르켜 주는, 그런 단순한 일. 어느 날 한 내원객께서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길을 물어보셨다.병원은 워낙 크고 북적이니, 처음 오신 분들은 길을 잃는 경우가 다반사다. 차분히 내원객 분께 방향을 설명드리고 나니, 그분의 표정이 금새 밝아지셨다. 그리고서는 나에게 말씀하셨다."이런 사람들이 의사가 되어야 하는데, 요즘 의사나 의대생들은 그렇지가 않아" 당황스러웠다. 그분은 내가 의대생이라는 걸 전혀 모르실 텐데…곧바로 이어지는 현 의정 갈등에 대한 말씀, 나는 "아, 네"라고 애써 웃으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썩 복잡한 심정이었다. 그저 평소처럼 응대했을 뿐인데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다니, 의대생으로 좋아해야 될지 슬퍼해야 될지 도통 알 수 없는 일이었다.평일에도 꾸준히 봉사활동을 나가다 보면, 대학생인지 물어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다음부터는 똑같은 레퍼토리다. 무슨 과인지, 몇 학년인지, 그때마다 "의대 다니고 있어요"라는 대답과 "아" 하는 상대방의 반응.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이곤 했다.최근 뉴스에서 조명하는 의사와 의대생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어느샌가 심장이 쿵쾅거리고 속이 메스꺼웠다. 타인이 '의대생'이라는 집단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지 않음을 인지할 때, 속상함과 함께 주눅드는 순간도 가끔은 찾아온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만, '나' 라는 인간을 대할 때와 나라는 '의대생'을 대할 때 과연 같을까 싶은 생각도 간혹 들었다.휴학 전에는 공부가 바쁘다는 핑계와 친숙한 동기들과 함께하며, 내가 아는 세상은 익숙한 안락함 속에서 존재했다. 하지만 익명의 자원봉사자로 나서면서 세상은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많았다.봉사활동을 하며 만난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배경과 사연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도 나름의 성찰을 하게 되었다. 봉사라는 단순한 활동이지만, 그 속에서 내가 속한 사회와 그 사회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었다. 특히 의대생이라는 신분은 기대와 부담을 동시에 안겨주었다.사람들은 흔히 의대생을 미래의 의사로, 고도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존재로 바라보지만, 그 기대 속에 내재된 감정은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봉사하며 만난 사람들 중 일부는 의사나 의대생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때로는 그 비판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마치 나 자신이 아닌, 내가 속한 집단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느껴져 혼란스럽기도 했다.하지만 이러한 경험들이 나에게 주는 교훈도 분명했다. 의대생 또는 휴학생이라는 모호한 나의 신분과는 별개로, 나는 한 사람으로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봉사활동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봉사는 단순히 남을 돕는 행위가 아니라,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는 과정이었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은 곳곳에 존재하고, 작은 친절일지라도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다른 사람들의 삶을 잠시뿐이지만 관찰하며 나의 일상에 대한 소중함도 느꼈다. 봉사활동을 통해 학기 중에 해보지 못했던 여러 경험들을 채워가면서, 스스로 많이 성장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봉사활동은 내게 세상을 더 넓게 볼 수 있는 시야를 주었다.휴학 후 봉사에 전념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의사와 의대생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의료 문제의 복잡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시선과 대화를 통해, 의료진에 대한 기대와 신뢰뿐 아니라 비판적인 감정이 공존하고 있음을 직접 느꼈다.의정 갈등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의 시선은 어쩌면 단순히 의사나 의대생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소통과 신뢰의 문제라는 생각도 들었다.결국, 봉사는 나에게 의사라는 직업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했고, 내가 속한 세상과 그 속에서의 나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기회를 주었다. 이를 통해 더 넓은 시각과 깊은 책임감을 가지고 앞으로의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2024-09-23 05:20:00젊은의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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