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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의 필요성에 대하여

[메디칼타임즈=경북의대 1학년 노정연 ]국경에 실존하는 장벽이 세워진 듯하던 팬데믹이 끝나고, 사람들은 그동안의 단절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여기저기로 여행을 떠났다. 평소 여행을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마저도 그동안 빼앗겼던 자유를 다시 찾으러 공항으로 향했다. 그렇게 전국적인 여행 열풍이 불던 시절, 홀로 동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동안 나에게 있어 여행은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일이었고, 막상 여행지에서도 그렇게 행복한 기억을 찾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평균적인 또래들의 삶과 발걸음을 맞추고자 떠났던 몇 번의 여행들은 그다지 자주 들여다보지 않는 앨범 속 사진처럼 형식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낯섦을 그다지 동경하지 않는 성격 탓일까, 혹은 사랑에 빠질 만한 여행지를 아직 찾지 못한 것일까. 몇몇 지인들은 여행을 가기 위해 고된 일상을 버틸 정도로 여행지 곳곳에서 행복을 잔뜩 찾아오는 것만 같았는데, 나는 무엇 때문에 여행지에서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걸까.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에 골몰하면서 나도 모르게 생각했던 것 같다. 답을 찾기 전까지는 여행을 삼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나는 여행을 떠나고 나서야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사실 거창한 목적을 가지고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존경하는 작가님의 강연을 듣고자 했고, 간 김에 관광을 조금이라도 곁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고속버스 안에서 가고 싶은 몇몇 장소를 겨우 추렸고, 그마저도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충동적으로 바뀌었다. 유명세를 믿고 찾아간 몇몇 가게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어떻게 보면 되는 일 하나 없는 여행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경험을 통해 여행이 가지는 가장 강력한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바로 '일상과의 단절'이다.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에 도착한 이후, 우리의 뇌는 매순간 위기 상황에 직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새롭고 낯선 장소에서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지도에 의지해서 처음 가 보는 경로를 찾아 헤매고, 새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감각하고 처리하여 기억으로 저장한다. 여행은 휴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뇌에게는 강행군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이다. 이렇게 뇌가 바쁘게 돌아가는 동안 자연스레 우선순위가 밀리는 것들이 있다. 바로 일상 속에서 끌어안고 있던 걱정과 고민들이다. 뇌의 빈 공간을 귀신같이 침범하던 불청객들은, 새로운 경험을 처리하느라 바쁜 동안에는 언제 있었냐는 듯 잊힌다.그동안 나는 여행 중에는 무조건 행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 적어도 나에게 있어 여행은, 일상 속 불행과 근심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까지는 몸은 일상에서 멀어지더라도, 여행지에서는 행복해야만 한다는 새로운 고민에 사로잡혀 정작 새로운 것들을 감각하는 일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했다. 이번 여행은 하루를 어떻게든 가득 채우고자 갖은 애를 쓰던 기존의 여행과는 시작부터 달랐고, 어쩌면 그래서 더욱 마음 편하게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생각해 보면 우리의 일상 속에서 꼭 필요한 것은, 잠시라도 걱정을 뒤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쉼표'이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여행일 것이고, 또 누군가에겐 독서가, 공연 관람이, 맛집 탐방이나 스포츠 경기 직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 과거의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여행을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렇지만 당신만의 '쉼표'를 꼭 찾길 바란다고 전하고 싶다. 마침표까지 가는 길이 너무 버거울 때, 당신만의 아늑한 쉼표에 숨어 휴식을 취할 수 있길 바란다고. 그 쉼표는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2025-09-15 05:00:00젊은의사칼럼

감정이 만드는 의료인의 길

[메디칼타임즈=가톨릭 관동의대 1학년 배지섭 ]서툴고 투박했던 나날들을 거쳐 지금의 내 모습을 이루기까지 감정은 없어서는 안 될 요소였다. 물론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게 둘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흔히 감정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과 달리 결국 감정도 이성만큼이나 나를 성장시켰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한 인간의 인성과 정체성이 유아기에서 청소년기에 걸쳐 완성되듯, 의료인으로서의 인성과 정체성은 의대생과 젊은 의사 시기에 본격적으로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는 환자를 마주하는 실제 경험과 의료 현장의 가치관이 몸에 스며드는 시기이며, 전문직으로서의 사명감과 윤리가 뿌리내리는 결정적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의과대학에서는 자라나는 의대생들을 어떻게 가르칠까?최소한 지금까지 필자가 느껴온 의과대학의 생활은 끊임없이 이성을 훈련시키는 과정이다.증상과 징후를 분석하고, 검사 결과를 해석하며, 여러 개의 질환 후보군 속에서 최종 진단을 위해 가능성을 좁혀 가는 훈련 속에서 감정은 종종 방해 요소처럼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환자의 눈물이 우리를 흔들고, 복도에서 가족의 흐느낌과 걱정이 귀에 메아리칠 때가 있다. 이럴 때면 어느 선배에게 들어왔던 ‘의사는 냉정해야 한다’는 조언이 실질적으로 가능한지에 관해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감정은 적절한 진료의 적일까?병원에서 마주한 수많은 순간은 나에게 다른 이야기를 속삭였다. 나는 국제성모병원 응급실 조기 임상실습, 연세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외상외과 실습, 국립중앙의료원 서울권역외상센터 견학을 다녀온 바 있다. 첫 심정지 환자를 만났을 때, 처음으로 응급실 바닥에 혈액이 뚝뚝 떨어지는 외상 환자와 마주친 순간을 선명히 기억한다.의대생과 젊은 의사 시절은 기억의 절편이 감정의 형태로 직격탄처럼 가슴에 꽂히는 시기다. 의사로서의 첫발을 내디디는 경험들은 단순히 한 줄의 의료 기록과 새로운 임상 지식으로 축적되는 게 아닌, 감정이라는 매개체로 우리 기억 속에 각인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한 사람의 의료인으로서의 윤곽을 그리게 된다.감정이 단순한 흔적을 넘어 기억을 살아 숨 쉬게 하고, 그 기억이 다시 의료인으로서의 토대를 단단히 다지기에 감정을 외면한 채로는 환자와의 관계도, 의료인이라는 신분으로서 나 자신도 온전히 설 수 없다.그럼에도 의사는 현대 의학의 정점에 서 있는 직업이기에,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이를 슬기롭게 ‘다루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정을 정확히 인식하고, 한 발짝 물러서서 그 의미를 해석하는 힘. 이렇게 하면 감정은 판단을 해치는 변수가 아닌, 환자를 향한 설득력과 신뢰를 만드는 도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한 가지 또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의료 행위는 자칫하면 부정적인 감정 속에 사로잡히기 쉬운 구조이다.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마냥 희망적이고 긍정적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환자들을 위해 적재적소에 올바른 감성을 끄집어내 쓰기 위해 의료인은 반드시 본인이 지켜야 하는 감정의 선을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위해 때로는 긍정적인 감정을 보충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마치 내가 실습에서 환자들을 마주하며 느꼈던 따스한 의지를 담은 감정을 글로 눌러 담아 가끔 읽어 보며 다시금 다짐하는 것처럼 말이다.이렇게 고찰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나니 감정은 결코 억누르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감정은 환자와 더 깊이 연결되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강력한 통로가 될 수 있다. 그 연결이야말로 의사가 지닌 기술과 과학이라는 가치에 사람다움이라는 따스함을 더해준다.이쯤에서 내가 읽었던 한 구절을 공유해 볼까 한다.젊음은 서툴고 투박해야 하며,사랑은 해맑고 촌스러워야 한다.젊은 의사로서의 삶은 이성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수술실의 긴장 속에서, 응급실의 소란 속에서, 병실의 고요 속에서 우리 의료인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감정을 잃지 않는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 감정이 때로는 서툴고 투박하더라도, 때로는 해맑고 촌스러워 보일지라도,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온전한 의료인이 되게끔 만드는 힘이다.중요한 것은 이 감정들을 숨기지 않고, 환자를 향한 진심으로 다듬어 나가는 과정이다. 그렇게 쌓인 마음들은 언젠가 차분히 빛을 발하며, 환자의 곁에서 한 사람의 인격과 전문성을 함께 품은 의사로 우리를 성장시킬 것이다. 결국 온전한 의료인이란 지식과 기술에 더해 따뜻한 감정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일 테니까.그래서 내가 걷는 이 길은 서툴고 투박한 감정을 지켜내어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사람다운 의사가 되기 위한 여정일 것이다.
2025-09-08 05:00:00젊은의사칼럼

경계선에서의 이해

[메디칼타임즈=고신의대 2학년 김민지 ]나는 모든 깨달음에는 그 시기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교육과정으로 예를 들자면, 인수분해는 선행 학습으로는 잘 와닿지 않지만 14살쯤 정규 수업을 통해 접할 때 이해가 잘 된다. 인간관계에서도, 불가피한 갈등의 순간이 찾아올 때 혼자 판단하기보다 대화를 해보아야 한다는 깨달음은 부딪힘을 감수하고 대화해 본 이후에야 얻을 수 있다. 이처럼 깨달음은 텍스트로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기까지의 과정과 경험이 있어야만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근,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은 일이 하나 있었다.대학교 합격증서를 받은 날, 나는 이제야말로 '어른'이라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더 이상 어른들의 잔소리에 일희일비하지 않아도 된다! 하고 싶은 것을 온전히 선택할 수 있다! 내가 지금껏 동경해 왔던 순간이 내 눈앞까지 성큼 다가왔고 해방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학생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지진 않았다. 패기와 무모함, 근거 없는 용기를 지닌 고등학생의 내 모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내가 학생과 선생 사이, 그 오묘한 경계선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과외를 하면서부터 실감하게 되었다.잘 푼 문제라면 잘 가르치리라 믿고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공부를 잘하는 것과 설명을 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지식의 온전한 전달은 요원한 일이었고, 수업할 때 쉽게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만나면 답답했다. '나는 이렇게 안 했는데'라며 한탄하기도 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생이었던 내가, 어느새 '이래서 요즘 애들은…'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아이들이 처음 배우는 개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해도 그러려니 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말과 생각을 조심하게 되었다. 나의 말 한마디, 태도 하나하나가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점점 학생의 눈보다 선생의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게 되었다.그 무렵, 이런 나의 변화를 알아차리게 해 준 책을 읽었다. 육상부 학생과 체육 선생님의 갈등을 다룬 이야기였다. 선생님은 요즘 아이들은 금방 포기하고, 힘든 훈련을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며 질려 있었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성적만 강요해 자신들의 힘듦에는 관심도 없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삐걱대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런데, 나는 그 선생님에게서도, 그리고 학생에게서도 모두 내 모습이 보인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이전까지는 학생이었기에, 이런 부류의 글을 보면 어른들이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할 때 꼰대라며 이름 붙이고 반발하는 학생들에게만 몰입하게 되었다. 사실 그때는 선생님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과외를 하다 보니 학생들에게 '조금만 더 해보자'라며 채근하고 성적이 안 나오면 속상해 한마디 하던 나의 모습이 이야기 속의 체육 선생님과 겹쳐 보였다. 이중적인 내 모습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다. 결국, 모두 겪어 보고서야 두 입장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학생들의 압박감도, 어른들의 답답함도 모두 진짜였다.우리는 종종 서로를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자신이 옳다며 대화 자체를 차단하곤 한다. 학생들은 '꼰대'라며 귀를 막고, 어른들은 '요즘 애들'이라며 벽을 세운다. 그렇게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자신의 입장에 몰두하다 대화는 하지 못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두 입장 모두 옳다. 어쩌면 뻔한 결론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그 뻔한 대답이 정답임을 이제야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서로가 자신의 입장을 말하느라 바빴던 시간 속에서, 나는 이제까지 내가 맞다고 믿는 순간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렸던 것 같다.결국 중요한 건 함께 대화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미묘한 경계선 위에서 두 입장을 모두 겪어 보고서야,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대학생이라는 경계선에 서 있다는 건, 한쪽의 목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를 오가며 균형을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 학생일 때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흘려듣기 일쑤였고, 어른들의 시선에선 아이들의 투정이 철없어 보이기 쉽다. 하지만 그 사이에 서 본 나는, 두 목소리 모두 진실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의 내가 어떤 위치에 있더라도, 지금의 이 감각을 잊지 않고 싶다. 서둘러 어느 한쪽에 서기보다 그 경계선 위에서 양쪽을 바라보려 한다. 이해는 그곳에서 시작되니까. 그래서 나는 대학생이라는 이 경계선, 지금의 나를 천천히 음미하려 한다.
2025-09-01 05:00:00젊은의사칼럼

발걸음을 떼면 길은 자연히

[메디칼타임즈=단국대 본과 3학년 박정은 ]지난 칼럼에서 IT 창업 동아리에 발을 들였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때로부터 고작 두 달. 달력을 몇 장 넘기지도 않은 시간 동안 나는 또다시 실제 서비스 개발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활동을 선택해 빈 페이지를 펼쳤다.이번 이야기는 보험이라는 낯선 소재로 시작된다. 내가 기획한 프로덕트가 보험 추천 및 커뮤니티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발단은, 단순히 있으면 좋은 서비스가 아닌,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 서비스를 만들고 싶어 했던 나의 강력한 욕구에서 시작된다.문제다운 문제를 찾던 중, 보험 시장에서 벌어지는 모순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구매자와 판매자 간의 정보 격차에서 기인하는 불균형이었다. 보험 시장에서 소비자는 돈을 지불하고 구매하는 입장인데도 100퍼센트 본인의 이익에 부합하는 상품을 구매하지 못하거나 상품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 은행 업무, 투자 등 금융의 다른 영역들은 앞다투어 천지개벽한 변화를 맞이하는 와중에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그 문제의식이 이번에 기획한 서비스의 출발점이 됐다. 홀로 도메인 공부와 문제 정의, 가설 설정과 검증 단계를 거쳐, 전반적인 서비스를 기획한 준비 단계. 200명의 메이커(디자이너와 개발자)들 앞에서 서비스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기획 경선. 각기 다른 전공과 경험을 가진 메이커 13명으로 구성된 팀 빌딩. 이후 2주간의 합숙을 포함해 총 5주간 서비스 개발 단계. 그리고 그 여정의 일차 종착역인 데모데이에서 우리가 만든 서비스는 최우수상이라는 보람찬 수확을 맺었다.그리고 앞서 나열한 모든 과정은 두 달 반 만에 이뤄냈다. ‘어떤 것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수식어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경험이었다. 이 밀도 높은 경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바로 말과 행동이 길을 만든다는 것이다.서비스 기획 단계에서 내가 가장 힘들었고 쩔쩔맸던 일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Q&A였다. 맞다, 그 Q&A, 내 서비스에 대한 질문 공세에 답하는 일. 서비스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 기획자 본인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어려울 것이 없어야 맞다. 하지만 혼자서 서비스를 구상할 때는 예측하지 못한, 한 번도 접근해 본 적 없는 관점에서 질문이 날아오기도 했다. '이 서비스를 기획한 주체인 내가 사전에 이 질문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 그런 질문들은 피할 수 없이 스스로의 빈틈을 직면하게 되는 순간들을 마주하게 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얕은 곳에 내가 서 있다는 깨달음은 내게 좌절을 안겼다.뻔한 이야기지만 결과적으로 질문들은 나를 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예측하지 못한 질문들에 답변하기 위해 자료를 찾고 논리를 세우는 과정에서, 나는 내 서비스에 조금씩 살을 붙여 나갔다. 복잡한 도메인의 특성상 질문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도메인 지식 - 우리 서비스에 제기된 문제 - 현실적 방안 - 장기적 방향성'의 구조로 답변을 짜는 과정에서 오히려 뭉뚱그려 생각했던 내용들이 선명해지기도 했다.물론 완벽한 답을 준비할 수 없는 질문들도 존재했다. 규제나 시장 상황처럼 현재로서는 불확실한 영역에 대한 질문들이 대표적이었다. 이런 질문들 앞에서는 논리적 근거를 최대한 제시한 후, 나머지는 실행 의지와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채운 답을 내놓아야 했다. '다음과 같은 현실적 제약이 있지만, 방법을 반드시 찾을 겁니다.'라는 다짐으로 답변을 마무리하면서 이게 답변인지 호소인지 스스로도 헷갈렸던 순간이 있었다는 고백을 이제서야 한다.신기한 건 이렇게 일단 답을 하고 나니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문제를 가능성의 영역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과제의 영역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무조건 해법을 찾는 쪽으로 사고가 전환되었다. 마치 입에서 나온 말이 나를 이끌어나가는 것 같았다.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 역시 나를 이끌었다. 이 프로젝트를 하기로 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이 서비스가 잘 될지 안 될지부터(지금도 모른다), 내 거취가 어떻게 될지, 졸업 후 미래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냥 '이건 진짜 문제다'라는 확신과 이걸 해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덤벼들었는데, 일단 시작하니 길이 이어졌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네트워크, 새로운 정보들이 연극에서 막이 하나씩 진행되듯 차례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이야기가 펼쳐졌다.두 달 반이라는 시간을 돌이켜보니, 가장 중요했던 것은 완벽한 계획이나 철저한 준비가 아니었다. 시작하는 용기였다. 보험이라는 복잡한 영역에 뛰어드는 용기, Q&A에서 불완전한 답변을 내놓는 용기, 13명의 낯선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용기. 그 모든 용기의 시작점은 입 밖으로 내뱉은 한마디였다.말을 뱉으면 어떻게든 하게 되고, 시작하면 길이 이어진다. 우리는 종종 완벽한 확신을 기다리지만 그 확신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완벽하지 않은 답변이라도 일단 내놓으면 더 나은 답을 찾게 되고, 불확실한 프로젝트라도 일단 선택하면 필요한 자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연극 무대에서 막이 올라가는 순간 배우들이 등장하듯이.지금 무언가를 시작하기를 망설이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완벽한 준비를 기다리지 말라. 대신 지금 가진 작은 확신으로 첫 발을 내딛어라. 말하라, 선택하라, 시작하라. 그러면 길은 자연히 이어질 것이다.두 달 반 전의 나는 보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서비스 기획도, 팀 프로젝트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작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발걸음을 떼면 길은 자연히 이어진다. 이것이 두 달 반의 여정이 남긴 가장 소중한 교훈이다.
2025-08-25 05:00:00젊은의사칼럼

의사가 연구할 때 생기는 일

[메디칼타임즈=경북의대 이진규 졸업생 ]얼마 전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공대에 미친 중국, 의대에 미친 한국'이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제목만큼이나 도발적이었고, 그 반향만큼이나 많은 질문을 던졌다.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을 떠나, 이 프로그램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의대 진학을 선호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미 수많은 인재가 의대로 쏠렸고, 그 경향은 좀처럼 꺾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경향을 되돌리기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어쩌면 답은 가까이에 있다. 바로 의사가 연구하는 것이다.특별한 일은 아니다. 연구에 왕도는 없고, 의사도 그 길을 묵묵히 걸을 뿐이다. 다만, 연구를 한다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터널을 홀로 걷는 것과 같다. 제아무리 단단히 준비하고 입구에 들어서도 터널 반대편은 아득히 멀다.일단 들어섰다면 뛰어가든 기어가든, 주저앉아 울다 다시 일어서든 계속 가야 한다. 내가 기대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워도 여전히 가야 한다. 돌아가기에는 이미 멀리 와버렸으니까.물론, 의사가 연구를 할 때 갖는 이점도 있다. 길고 긴 터널 끝에 활짝 웃고 있을 환자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 진짜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학자는 기술을 보지만, 의사는 환자를 보고, 공학을 하는 의사는 둘 다 본다.불편해하는 환자들의 어두운 밑그림에 약이나 수술 대신 연구라는 붓으로 희망을 덧칠할 수 있다. 환하게 빛나고 있을 터널 끝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걸을 수 있다. 환자를 위해, 사회를 위해, 그리고 흔들리며 걷는 나를 위해.연구하는 의사가 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터널 입구로 들어서기도 전부터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의예과 2년, 의학과 4년, 그리고 의사면허 취득이라는 허들을 넘어야 겨우 환자를 마주할 자격을 부여받는다.그때부터 쌓아가는 환자와 함께한 이야기들이 임상경험이라는 이름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터널 반대편 끝에서 마주할 그들의 밝은 얼굴을 그려볼 수 있다. 아직 연구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그래서 의사과학자 선배들이 존경스럽다. 여럿이 걷는 길은 가볍지만, 홀로 걷는 길은 무겁다. 고된 시간을 지나 충분한 임상경험을 쌓아왔음에도 어두운 터널 앞에서 다시 시작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막막한 길을, 그것도 남들은 선택하지 않는 그 외로운 길로 들어선 그들을 떠올리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나는 언제쯤 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호기롭게 시작한 길이었지만, 현실은 냉혹했고 마음은 크게 요동쳤다. 부모님의 걱정, 선배들의 충고, 친구들의 시선. 진심이라는 이름으로 건네진 조언들이 내면을 파도처럼 뒤흔들었지만, 연약한 나는 갈등 속에서도 발걸음을 옮겼다.역설적으로, 비틀거렸기에 마음은 단단해졌고 결국 출발선에 다시 섰다. 터널 저편에서 웃고 있을 환자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이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어서.그러나 다짐만으로는 부족했다. 동기들과 다른 속도로 걷는다는 사실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길이라는 현실이 어깨를 무겁게 했다. 생활과 미래를 저울질하는 계산기 속 숫자는 끊임없이 바뀌었고, 불안은 틈새마다 스며들었다. 그런데, 터널 속에서 문득 깨달았다. 이 길이 나 혼자 선택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등 뒤에서 희망이 반짝였다.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발자국을 좇는 내가 있듯, 미숙한 나를 쫓는 후배들이 있었다. 그들의 반짝이는 이야기를 들으며 한 번 더 다짐을 되새긴다. 그리고 외로운 발걸음 위에도 다시 빛이 내려앉는다. 한 걸음 더 내디딜 힘이 생긴다.그리고 또 다른 희망이 눈앞에 다가왔다. 바로, 수년 전부터 시작된 '융합형 의사과학자 육성사업'이다. 임상이 아닌 다른 자연 과학 및 공학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고자 하는 의사들을 대상으로 정부에서 지원하는 사업이다.의대생 시절부터 전공의, 박사과정, 박사 후 연구원 과정까지 단계별로 지원받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넉넉한 연구비뿐만 아니라 인건비까지 지원된다. 길고 험한 터널을 지나는 동안 배고프지 말라고, 목마르지 말라고 빵과 물을 건네는 사회의 손길이다.그제야 비로소 알게 됐다. 내가 선택한 이 길이, 결국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길과 만나고 있다는 것을. 나아가야 할 길이 막힌 것 같다면, 아예 다른 길을 찾거나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 가지 않은 길에 답이 있을 수 있다. 의대 편중이라는 사회 문제의 해답이 바로 의사들이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는 것에 있을 수 있다.터널은 여전히 어둡고, 여전히 길다. 하지만 이제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걷고 있는 동료들이 있고, 우리를 응원하는 사회가 있다. 무엇보다 이 길은 환자를 위한 길이자, 우리 사회가 균형을 찾아가는 길이다.그래서 말하고 싶다.'너, 내 동료가 돼라!'
2025-08-18 05:00:00젊은의사칼럼

大 Chat-GPT 시대의 글쓰기

[메디칼타임즈=고려의대 2학년 강지민 ]요즘 들어, 글을 쓸 때면 자주 멈칫하게 된다. 예전처럼 첫 문장을 찍어 내는 데에도 망설임이 많아졌다. '이 글을 굳이 내가 써야 할까?', '이미 누군가가, 아니 어쩌면 이미 AI가 더 잘 쓰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빠진다. 이른바 생성형 인공지능이니, LLM이니 하는 기술들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면서, 우리는 어느새 '쓰기'라는 행위에 대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는 시대에 놓였다.예전에는 글쓰기가, 적어도 한 사람의 고유한 생각과 감정이 반영된 행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믿음마저도 흔들리는 순간들이 잦다. 누군가는 말한다. 'AI가 충분히 쓸 수 있는 글이라면, 굳이 사람이 쓸 필요가 없다'라고.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는 묻게 된다. 나는 왜, 여전히 이렇게 종이 위에, 혹은 화면 앞에 앉아 단어를 하나하나 옮기고 있는 걸까.이번 칼럼은 조금 독특하지만, 제목에 걸맞은 시작을 해보았다. 본 글의 서론은, 그간 필자가 메디컬타임즈에 기고한 글 몇 건을 학습한 Chat GPT(무료버전)가 처음부터 끝까지 작성해 주었으며, 이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워드에 옮겨 담았다. 뻔히 자기가 글을 생성해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 앞에 앉아 단어를 하나하나 옮기고 있는 걸까'라는 문장을 쓰는 게 약간 괘씸하게 느껴진다. 이 와중에 또 내가 쓰던 글의 특성이 그대로 묻어나 있어 반쯤은 놀랍고 반쯤은 무섭기도 하다.초등학교 시절 매일 밤 연필을 잡고 꾹꾹 눌러 쓰던 일기로 시작해, 이따금 칼럼을 싣는 기회를 얻기까지, 나는 십수 년간 꾸준히 글을 써왔다. 당연히 내 나름의 문체, 약간은 정형화된 글쓰기 스타일이 있다. 그런 나의 글을 똑똑한 GPT는 이렇게 분석했다."네 글에는 공통적으로 아래와 같은 특징이 있어:개인적인 경험과 질문에서 출발: 구체적이고 일상적 장면이나 고민에서 시작해서, 경험의 끝에 가서는 반드시 사회적, 구조적 문제 혹은 보편적 질문으로 확장해.'나'라는 1인칭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감정을 억누르거나 객관화하려 하지 않고, 너 자신에게 솔직해.긴 문장과 문단: 한 호흡이 길고, 쉼표가 여러 번 들어가며 생각이 이어짐. 독백 같고, 일기 같은 느낌을 줘"그냥 요청한 대로 서론만 써줄 것이지, 항상 내가 부탁한 결과물을 내어 주기 전에 이렇게 본인만의 분석을 곁들인다. 꼭 스스로의 버릇을 들킨 듯한 기분이라, 한 문장 한 문장을 쓸 때마다 너무 길진 않은지 고민하게 되고, 글의 구성도 또 지나치게 확장적이지 않은지 의식하게 된다. 안 그래도 어려운 글쓰기를 더더욱 어렵게 만들다니, 정말 고약하다.이세돌 9단과 알파고가 펼쳤던 세기의 대국 후 강산이 또 한 번 바뀌었다. 그사이 이름도 생소했던 AI는 어느덧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왔다. 이쯤에서 기계의 역사를 아주 간략하게나마 되짚어 보자. 태초의 기계는 인간의 수고를 조금 덜어주는 데에서 출발해, '기계적이다'라는 형용사가 만들어질 만큼 지치지 않고 반복적인 일을 해내었다. 이것이 곧 자동화의 물결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육체적인 노동이 아닌 '생각'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역할이었다. 하다못해 컴퓨터도 인간의 명령어를 입력해야만 어떤 연산을 수행할 뿐, 독자적으로 무언가 구상하고, 고안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자 그간 인류 문명의 번영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물론 AI 기술이 기계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계라는 선례가 있고, 그 초기 기능은 기껏해야 검색 엔진에서 조금 발전한 수준이었기에, 사람들은 AI가 단순한 연산이나 사무 작업 정도나 대체할 것이지, 창작자들은 AI로부터 자유로이, 본인만의 굳건한 영역을 점유할 것이라 예상했다.그런데 웬걸, AI는 너무도 손쉽게 우리가 그간 인간만의 능력이라 생각했던 '창작'을 시작했다. '학습'과 '모방'은 단순 지식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예상보다 빠르게, AI는 글의 구조를 학습하고, 그림을 픽셀 단위로 나누어 분석했으며, 음악의 구성 요소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유튜브에 들어가면 널려 있는 AI 작곡, 몇 달 전 전 국민의 프로필 사진을 바꾸어 놓았던 지브리풍 사진까지. 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최근에는 한 기자가 AI가 써준 기사를 프롬프트까지 그대로 복사한 게 들통나 논란이 되기도 하지 않았나.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쓰는 모든 글이 다 엄청난 창의성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글의 종류에 따라, 이따금씩은 GPT가 사람보다 유려한 글을 써내기도 한다. 올해 초, 우연찮게도 한 해외 대학의 연구실에 인턴 지원서를 내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너무나 좋은 기회였지만, 단기간에 태어나서 한 번도 써보지 않은 CV를, 그것도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작성해야 하는 과제가 떨어졌다. 예과 1학년 때 배웠던 cover letter나 resume 쓰는 법, 교수님께 메일 드리는 법 등이 아련히 떠올랐지만, 그저 내가 그 내용을 배웠다는 사실만 기억났을 뿐이었다. 당시 학적도 애매했고, 시기도 조금 일반적인 케이스는 아니었기에 참고할 만한 자료를 찾고자 열심히 구글링을 했지만, 선례도 부족했고, 제출 기한이 굉장히 촉박했던 탓에 물어볼 사람도 별달리 없었다.그래서, GPT를 결제했다. 30달러를 통해 업그레이드된 GPT는 나의 거친 문장을 academic하고 polished한 것으로 바꿔주는 가장 큰 조력자였고, 고쳐도 고쳐도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는 듯해 교수님께 메일 드리기 전 발을 동동거리던 나의 불안감을 해소해 주는 상담가였으며, 무엇보다 나와 함께 밤을 새우는 좋은 친구였다. 조금 과장해서 나의 CV는 8할을 GPT가 썼다 해도 무방하다. 고마울 따름이다.지금의 나는 워드 프로세서가 아니라 손으로 쓰는 글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물론 어릴 때의 교육으로 원고지 쓰는 법을 대강 알고는 있으나, 수정이 간편하고 각종 표시를 할 수도 있는 워드 프로세서가 좋다. 하지만 설령 누군가가 손으로만 글을 쓴다고 해서, 그게 옳고 그르다는 가치 판단을 할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그저 본인의 스타일일 뿐이다.GPT 활용 역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확실한 것은, 본인의 생각을 담는 글이 아닌 정형화된 글쓰기에서 GPT는 정말 훌륭한 도구이다. 일전의 내가 오랜 시간에 걸쳐 배웠어야 하는 이론, 혹은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애매한 뉘앙스의 차이를, GPT는 파악하고 '내 글에' 이를 곧장 적용해 준다. 기존의 학습이 이론-예제-유제-실전의 네 단계를 통해 이뤄진다면, GPT는 이 과정들을 뛰어넘어 이론에서 곧장 결과로, 혹은 설령 필자가 이론에 대해 아는 바가 전무하다 하더라도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어준다.내 글은 어디까지가 나의 글일까? 가령, GPT를 일부 활용해 글을 작성한다고 치자. 기존에 내가 작성해 둔 글을 학습시킨 GPT에게 내가 구상한 글의 방향성과 상세 내용을 제공하고 '내 문체에 맞게 써줘'라고 요구하는 거다. 그리고 도출된 결과물을 내 말맛에 맞게 퇴고한다면, 과연 이건 나의 글일까, 아니면 GPT의 글일까? 뼈대가 되는 아이디어는 나의 것인데, 살만 다른 존재가 붙여 주었다고 해서 과연 그 글이 내 생각이 담기지 않은 글이 되는가? 그렇다면 글의 본질은 무엇인가. 껍데기인가, 아니면 그 속에 담긴 생각인가?시대는 변한다. 하지만 앉아 있는 내 앞에 놓인 빈 종이, 혹은 화면이 요구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너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GPT는 마법상자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욱 구체적으로, 더욱 명확하게 적어 프롬프트에 입력할수록 보다 짜임새 있는 결과물이 나오고, 때로는 GPT가 작성해 준 문장을 통해 내 글의 방향성이 더 명확해질 때도 있다. GPT와의 글쓰기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글을 통해 진정 전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 숙고하게 된다.달라지는 시대 속, 우리는 제 자리를 찾아오는 연어마냥 같은 질문으로 회귀한다. 바야흐로 大-GPT의 시대, 어떻게 지칭해야 할지도 모르는 대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인간인 나의 글쓰기는 역설적이게도 그 본질을 이루는 질문에 한 걸음 더 다가선다.
2025-08-11 05:00:00젊은의사칼럼

병원은 공정한가요

[메디칼타임즈=가톨릭관동의대 3학년 안하은 ]"한 명만 수술할 수 있다면,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는 지진 현장에서 마주한 의료인의 딜레마를 다룬 장면이 나온다. 무너진 건물 안에서 발견된 두 명의 환자 중 한 명은 젊은 남성, 다른 한 명은 고령 남성이다. 두 명 모두 위중한 상태이며, 서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구조물이 연결되어 있어 한 명을 살리기로 선택하면 다른 한 명은 죽게 된다.드라마에서는 결국 고령 환자의 양보로 젊은 환자가 수술을 받는다. 의료인으로서, 이처럼 한 사람을 살리는 선택이 곧 다른 한 삶의 죽음을 의미하는 상황에서 과연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극단적인 드라마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얘기할 수 있지만, 의료인이 마주하는 공정성의 딜레마는 계속 반복되고 있다. “환자는 네 번째 병원으로 이송 중 심정지를 일으켰습니다." 뉴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병원 뺑뺑이 사건은 더 이상 예외적인 비극이 아니다.응급환자가 구급차를 타고 병원을 전전하지만, 병상은 없고 인력도 없다. 수술이 가능한 병원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다 결국 기회를 놓치고, 생명까지도 잃는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묻는다. “도대체 왜 그 사람은 치료받지 못했을까?"문제는 단지 병상이 부족하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의료 현장은 자원이 유한한 공간이며, 모든 환자를 동시에 살릴 수는 없다. 결국 누군가는 먼저 치료를 받고, 누군가는 다음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이 선택은 단순히 순서의 문제가 아니라, 의학적, 윤리적, 현실적인 판단의 총체이다. 의료진은 응급도, 회복 가능성, 생존율, 병력 등을 고려해 환자의 우선순위를 판단한다.이 기준은 의학적으로 정해 놓은, 환자들을 효율적으로 살리기 위한 시스템의 일부이다. 그러나 그렇게 내려진 ‘합리적인 선택’은 때때로 감정적으로 불공정하게 느껴진다. 한 환자는 살아남고, 다른 환자는 병원 문턱조차 넘지 못한다면, 남겨진 사람들은 이해가 아니라 의문을 안게 된다.공정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모두에게 똑같은 대우를 하는 것일까? 병원에서는 그 정의가 훨씬 더 복잡하다. 공정은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상황과 가능성에 따라 다르게 접근하는 것에 더 가깝다. 그래서 의료 현장의 공정은 종종 형식적으로는 타당해도, 정서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를 낳는다.나는 의대생이므로 아직 직접 그런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서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병원에서, 뉴스에서 수많은 환자들의 삶과 죽음을 지켜보는 동안 공정한 선택이란 말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동반하는지를 점점 실감하고 있다. 누군가의 생명을 먼저 살리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 그 판단의 무게는 의학적 지식만으로 감당할 수 없다.공정성은 정답이 아니라, 불완전한 상황 속에서 가능한 최선의 태도이다. 모든 생명을 살릴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공정은 완벽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고민되어야 한다. 그러나 마음만으로는 남겨진 이들의 슬픔과 의문을 모두 덜어줄 수 없다. 의료인은 생명을 살리는 사람인 동시에, 살리지 못한 생명과 그 가족에게도 마주 서야 하는 사람이다.그 순간 의료인은 선택의 과정을 솔직히 밝히고, 왜 그런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숨김없이 설명해야 한다. 그저 규칙이 그렇다고 말하는 대신, 환자의 상태와 가능성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그 판단의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어야 한다.어느 누구도 설명 없이 배제되지 않도록, 누구도 이유 없이 소외되지 않도록 공정한 기준과 투명한 설명이 함께 작동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스템 안에서 의료인은 결국 선택의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 된다. 그 판단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겠지만, 적어도 최선을 다해 판단했고, 그 누구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공정한 선택이었다는 회피보다는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며 진심을 다한 충분한 설명과 위로를 전해줄 수 있는 의료인이 되고 싶다.
2025-08-04 05:00:00젊은의사칼럼

초심자의 행운

[메디칼타임즈=순천향의대 3학년 오명인 ]흔히들 초심자에게는 행운이 따른다고 한다.지난 1년간 세상은 의대생들에게 "하고 싶은 건 뭐든 해보라"고 문을 억지로 열어주는 듯했다. 학업을 핑계 삼아 평생 미뤄두던 일들에 의대생들이 '초심자'로서 뛰어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행운이 따르던가?작년 이맘때쯤 나는 대학생 창업 동아리 '메디럭스'에 가벼운 호기심으로 가입했다. 시간이 남아도는 의대생들 사이에서 스타트업은 하나의 유행처럼 자리 잡았고, 마침 헬스케어에 특화된 동아리를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동아리 구조는 단순했다. 약 70명의 팀원이 각자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가장 많은 표를 받은 10명이 팀장이 되어 반 년간 팀을 이끌었다.의대생이라는 타이틀의 장점이자 단점은, 사람들은 학력 하나로 뭐든지 잘할 것이라 착각한다는 것이다. 암기와 시험에만 익숙해 제대로 된 팀 프로젝트 하나 경험해 본 적 없는 내가 팀장으로 뽑힌 것도, 그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의 얼떨떨한 창업 도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내 아이디어는 '웰다잉(Well-dying)'과 '호스피스'였다. 기대수명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말기 판정 이후의 삶에 관심이 높아졌고, "행복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돈을 기꺼이 지불할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러나 창업을 해본 사람은 안다. 모든 '야심찬 아이디어'는 이미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대부분은 진작에 실패했다는 것을. 나 역시 첫 리서치에서 자신감을 잃었고, 피보팅(사업 방향 전환)을 반복하다가 결국 시작점부터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창업에서는 '페인 포인트', 즉 고객이 실제로 느끼는 불편함을 정확히 아는 것이 핵심이다. 내가 내놓은 문제는 뉴스 기사나 나의 직관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우리 팀은 곧바로 인맥을 총동원해 호스피스 환자의 가족, 전담 의사, 간호사 분들을 인터뷰하고 말기 암 환자 카페의 글들을 밤새 읽으며 진짜 '페인 포인트'를 찾았다.우리는 환자와 가족이 말기에는 '집'에서 머무르길 원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응급상황에서의 부담과 죄책감 때문에 많은 이들이 '병원'을 선택했다. 오히려 우리의 아이디어가 진짜로 필요한 사람들은 그 중간, 예를 들어 신체 활동은 가능하지만, 전신 상태가 약화된 암 환자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한 홈케어는 어떤 형태일지 고민했다. 재택의료 학회에 직접 참석해 전문가들의 강연을 듣고, 실제로 재택의료를 전문으로 운영하는 병원을 방문해 현장을 견학했다.하지만 '필요하다'는 것과 '팔린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언젠가는 말기 암 환자를 위한 홈케어 모델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생겼지만, 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청사진을 그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방향은 유지하되, 미래의 고객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작고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자고 다시 아이디어 회의를 시작했다. 그 결과, '암 환자의 통증 관리'에 초점을 맞춘 어플 개발로 방향을 바꿨다. 삶의 질과 직결되지만, 상대적으로 간과되던 문제였다.이 모든 과정과 병행해 우리 팀은 창업 대회에 참가했고, 1차, 2차 심사를 통과해 어느새 최종 데모데이 무대에 서게 되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발표했고, 솔직히 말하면 결과물은 아직 미완성에 가까웠다. 구체적인 결과물을 눈앞에 보여주기보다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웰다잉, 홈케어의 비전을 제시하면서도 당장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암 환자를 위한 통증 관리 앱'을 보여주었다. 나의 발표는 누군가에겐 애들 장난처럼 보였을 것이다. 데모데이 무대에서 발표를 마친 그 순간까지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러나 발표가 끝난 뒤 심사위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그간 헤매고 고민했던 반 년간 절대 헛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고객이 누구인지, 우리가 해결하려는 문제는 무엇인지, 앞으로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적어도 그 질문들 앞에서 나는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비록 완성된 서비스를 내놓지는 못했지만, 나는 사람을 모았고, 문제를 좁혔으며, 고객의 목소리를 들었다. 창업 용어 하나 모르던 내가 피칭 자료를 만들고, 인터뷰 질문을 고민하며 고치고, 개발자와 디자이너와 함께 MVP를 구현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하나 부딪치며 만든 첫 번째 결과물로, 우리는 결국 창업대회 최종 수상까지 할 수 있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커다란 상금 패널을 들고 단체사진을 찍는 그 순간, 수없이 헤맨 시간이 하나의 답처럼 돌아온 듯했다.초심자는 어설프고 서툴 수밖에 없다. 어설프고, 더디고, 열 번 시도하면 아홉 번은 실패한다. 그러나 그 아홉 번의 실패가 씨실과 날실로 촘촘히 엮여 당신이 내딛어야 할 다음 걸음을 지지한다. 초심자의 행운이란, 새로운 세계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실패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
2025-07-28 05:00:00젊은의사칼럼

이해되지 않는 기묘한 마음이 있다

[메디칼타임즈=단국의대 1학년 유우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마음이 있다.며칠 전 내가 편집팀으로 있는 의대생 단체 '투비닥터' 인터뷰 촬영 현장에 나갔다가 정점을 찍은 생각이다. 7월에 발간될 투비닥터 매거진에 들어갈 중요한 인터뷰였고, 인터뷰이께서 영상 촬영을 허락해 주셔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편집팀과 온갖 카메라 장비를 진 카메라팀까지 선릉역에 모였다.결코 쉽지 않은 하루였다. 영상 촬영 장비는 이동용 캐리어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많았고, 인터뷰 현장 세팅에만 두 시간이 걸렸다. 하필이면 날씨도 엉망이었다. 인터뷰 시작쯤에는 찌는 듯이 덥다가, 끝나고 철수할 때는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쏟아졌다.인터뷰에 대답해야 하는 나도 긴장과 낯섦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지만, 감히 힘들다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카메라 팀장 선배(영상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같은 의대 휴학생 신분인) 때문이었다. 까만 티가 땀인지 비인지 모를 것에 흠뻑 젖은 채로 그는 분주하게 장비를 세팅하고 짐을 옮기며 돌아다녔다.선배는 인터뷰 이틀 전부터 외부 촬영 전문가를 섭외하고, 장비를 대여하느라 이미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실제로 촬영이 끝나고 밥을 먹으러 가서도 진이 다 빠져 평소와 다르게 말수도 없어진 그를 보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중요한 콘텐츠라고는 하나, 실은 독자도 많지 않은 우리 매거진과 유튜브 채널에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그가 신기하기도 했다. 스스로도 과했나 싶었는지, 밥을 먹다가 그가 중얼거렸다."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그야말로 내가 생각하던 질문이었기 때문에… 별로 보태 줄 말이 없어서, 나는 그냥 늘 하는 말만 되풀이했다."뭐… 좋아하니까 하는 거죠"더 우스운 것은, 그 말에 그가 그저 푸흐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굳이, 이렇게까지, 대체 왜? - 좋아하니까.그래, 나는 이 '좋아하는' 마음의 족적을 여러 차례 보아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참 알 수 없다 생각하며 족적을 오래 지켜보았다. 가령 좋은 공대에 갈 수 있는 내신 등급을 충분히 잘 쌓아 놓고 고등학교 3학년 때에 옷이 너무 좋다는 이유로 갑자기 의상학과로 진로를 튼 소꿉친구. 혹은 이미 학사까지 따 놓고 취업을 코앞에 두었는데 새롭게 배우의 길을 시작한 옛 지인. 아주 가깝게는 본업과는 영 동떨어진 일인 회화 전시를 주관하느라 몇 달을 고생하는 엄마. 힘들지 않냐고 묻는 내 질문에 그들은 늘 똑같이 말했다. "이게 너무 좋아“좋다 - 라. 그 마음이 그렇게나 유의미한가? 나는 이에 대해 꽤 냉담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좋아한다는 마음이 생산적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마음을 눌러 둔다고 해서 우리의 삶에 큰 지장이 생기는가? 역시나 그렇지 않다. 외려, 세상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대가를 지불했을 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음을 자주 보여주는 듯하다. 나는 그 거래의 합리성을 가장 신실하게 믿는 사람이었다.글 쓰는 것은 언제나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 일기를 쓸 때도, 중고등학교 때 백일장에 나갈 때도, 아니면 그냥 공부하기 싫으면 낙서나 메모를 아무렇게 끄적일 때마저도 항상 즐겁게 펜을 휘갈겼다. 다른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게임으로 풀 때 나는 미친 듯이 글을 쓰거나 필사를 했다. 어쩌면 평생 글을 쓰는 것이 행복할 수도 있겠어. 자주 그렇게 생각했고, 실제로 글을 쓰는 진로에 몰두했던 적도 있었다.그러나 조금 더 세상을 많이 관찰하고 난 후에 나는 펜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미련 없이 내려놓은 '좋아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막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가장 가치롭다고 생각했고, 그에 맞춰 냉정하게 스스로를 진단했다.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절대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닌 나. 더군다나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데에 쓰일 리 없는 내 어쭙잖은 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야망과 고작 좋아할 뿐인 글은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다.세상을 바꾸는 일과 좋아하는 마음을 지키는 것은 등가교환이 불가함을 확신했다. 그렇게 딱 나누어 떨어지는 계산을 끝내고는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한다는 건 그저 좋아하고 끝인 거지. 거기 뭘 내걸고 좇는 건 기묘해.그리고 좋아하는 마음을 기묘하다 치부한 내 오만은 한순간에 나를 벼락처럼 뒤흔들었다.입시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여유로운 대학 생활을 시작하며 펜을 다시 슬쩍 들었을 때부터 진동은 시작되었다. 힘주어 쥐었던 전과는 달리 아주 가볍게 든 펜이었다. 혼자 독후감을 쓰거나, 종종은 격한 감정을 담은 일기를 쓰거나, 자문자답하며 논설문을 쓰거나. 처음에는 그것만으로도 전처럼 즐거웠다. 그러나 이내 다른 사람들도 내 글 읽어봤으면 좋겠는데, 하는 욕심이 슬그머니 생겼다. 그 단순한 욕망에 이끌려 투비닥터에 들어갔다. '좋아하는 마음'의 본격적인 반격은 그때부터였다.지난 1년 반 동안 몇십만 자를 써 내려갔다. 매 글이 쉽지 않았다. 세상에 보이는 글을 쓰는 일은 만만치 않으니까.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소모가 많은 일이었다. 다만, 내내 즐겁기 그지없었다. 책 <코드블루>에 의료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칼럼을 써보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의 얼떨떨함은 매큼하게 나를 자극했다.투비닥터 매거진에 수록된 내 에세이를 형편없다고 생각했는데, 참 아름다운 글이라고 익명의 독자에게 DM을 받은 날은 하루 종일 그 화면만 들여다보았다. 메디컬 타임즈에 기고하는 글의 퀄리티를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며칠 밤 머리를 싸매고 글을 뜯어고친 날들도 다크서클은 한 바가지였으나 완성된 글에 행복했다.그리고 이번 상반기 내내 투비닥터 매거진 10호를 만드는 데에 유례없는 몰입을 하면서 나는 온전히 글을 쓰는 일에 빠졌다. 기사 퀄리티가 좋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레퍼런스가 될 시중 매거진을 사고, 며칠씩 새벽 1시까지 이어지는 편집 회의를 거듭하며 더 좋은 기획 기사를 위해 노력하고, 도서관에 주저앉아 방대한 자료를 뒤졌다.모든 일은 굳이 싶을 정도로 열과 성을 쏟아부었다. 처음에는 이 매거진을 사람들에게 읽게 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드리라는 어설픈 사명감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을 하면 할수록 꼭 세상을 좋게 만들지는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후에 그 사명감이 무색하게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오더라도 지금의 에너지 소모를 아깝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렇다면 굳이 밤을 새우면서, 이렇게까지 강박적으로 자판을 두드리면서, 대체 왜 나는 이러고 있나. 힘에 부치면서도 노트북을 부여잡을 때, 매번 불퉁스럽게 자문했다. 그리고 반복되는 질문 끝에 비로소 완성된 답은 나를 완전히 함락시켰다.글을 쓰는 것이 너무 좋으니까. 그저 지금 즐거우니까. 쓰는 것이 좋고 쓰인 것을 편집하는 것이 좋고 쓰기 위해 구성을 만드는 것이 좋다. 좋으니 끝이다.내가 스스로 던진 질문들이, 등가교환이 아님을 알면서도 기꺼이 글을 좇은 나의 감각들이, 전에는 알 수 없다 생각했던 타인들의 기묘한 족적과 같은 궤를 하고 나를 휘감았다. 체념한 척 기쁘게 패배를 맞이한 순간이었다. 결국 나도 그 기묘한 세계에 던져졌구나.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기묘한 마음이 있다. 얼마나 기묘하냐면, 세상에 유의미한 영향을 줄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할 수 없는 일들에 굳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쏟게 만드는 마음이다. 너무 기묘해서, 시답잖은 경험에도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을 부여해 합리적 계산을 불가하게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결국은 우리를 끌고 가, 마치 판타지 영화에서 나올 것만 같은 즐겁고 멋진 세계를 보여주는 마음이다.올여름 나는 파도 타듯 그 마음을 타고 있다. 휴학과 복학이 맞물리는 그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는 7월,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분주히 손을 놀려야 한다. 쌓인 일감들은 꼭 인터뷰 날 카메라 팀장 선배의 수많은 장비처럼 덩치도, 갯수도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그들을 들쳐 업고 이 여름의 파도를 즐겁게 타보려 한다. 비가 오든, 더위에 녹을 것 같든, 얼마든지 즐거울 자신이 있다. 좋아하니까!펜을 들자, 기묘하고 반짝이는 마음을 위해!
2025-07-21 05:00:00젊은의사칼럼

모두가 조금씩 아픈 시대

[메디칼타임즈=가톨릭관동의대 1학년 정지은 ]골프 연습장에 간 날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한 오후, 드라이빙 레인지 한쪽 구석에 젊은 여자 두 명이 가방에서 옷을 다섯 벌 넘게 꺼내 차례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자세를 바꿔가며 서로를 찍어주고, 그 자리에서 사진을 고르고 필터를 입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건 2일 차 느낌으로 가자. 리조트 골프 온 것처럼 보여야 해" "여기선 스윙 말고, 백스윙 직전이 더 예뻐" '#필드룩', '#힐링타임', '#골린이' 해시태그가 박힌 인스타그램 속 수많은 피드가 겹겹이 아른거렸다.며칠 뒤, 퇴근 시간 무렵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앞 도로에서 차 한 대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옆 차의 중년 남성이 문을 열고 나와 앞차 운전자에게 소리쳤다. "왜 끼어들어? 당신이 나보다 잘났어?” 그는 창문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고, 앞차 운전자는 아무 말 없이 창문을 닫았다.그날 밤, 며칠간 있었던 일들을 조용히 곱씹으며 나는 묘한 허탈감에 잠겼다. 누군가는 자기 자신이 아닌 모습을 애써 꾸미고, 또 누군가는 타인을 향해 지나치게 날을 세운다. 전혀 다른 장면이었지만, 그 안에는 묘한 공허와 닳아버린 피로가 스며 있었다.요즘 나는 자주 이런 순간들을 목격한다. 모두가 다 조금씩 불안하고, 조금씩 무너져 있고, 동시에 이를 부정하며 애써 괜찮은 척하는 모습들. 타인의 성공에는 묘한 질투심을 느끼면서도, 자신은 로또에 당첨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현대인의 정신 상태는 마치 투명한 금이 간 유리처럼, 멀쩡해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와르르 깨져버릴 듯 위태롭다.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것일까. 더 나아가, 우리는 왜 이토록 '정신의 건강'에 무관심해졌을까?마음도 병들 수 있다는 것우리는 몸의 고장에는 민감하면서도 마음의 이상에는 유독 무심하다.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고, 피로가 쌓이면 주저 없이 병원을 찾는다. 하지만 마음이 무너질 때는 다르다. "그 정도는 누구나 겪는 일이지”,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같은 말로 대충 덮어버린다. 정작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고통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냥 그런 날이라고 치부하며 지나가는 일이 많다.하지만 마음도 병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의대 수업 시간, 우리는 수많은 질환의 기전을 배우고 치료법을 외운다. 그중 우울증은 단순한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뇌 속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이 무너지는 생물학적 질환이며, 불안장애는 공포 반응을 조절하는 편도체와 전전두엽의 기능 이상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배운다.하지만 이러한 지식조차도 감정이 무거워질 때는 무력해지고는 한다.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는 날이면 먼저 자신을 다그치게 되는데, 나 역시 그렇다. "이 정도로 힘들면 안 되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난 게 없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고, 감정을 외면한 채 하루를 마무리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저 말없이 쌓여 버린다.건강한 정신이란 '괜찮지 않은 나'를 받아들이는 힘세계보건기구(WHO)는 정신 건강을 "삶의 스트레스를 건설적으로 감당하고, 생산적으로 일하며,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상태”라 정의한다. 나는 여기에 한 줄을 덧붙이고 싶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상태'라고.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자신을 억누르지 않는다. 기쁨은 솔직하게 누리고, 불안이나 질투도 들여다보며 그 감정의 시작점을 되묻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질투가 일어날 때는 "왜 내가 저 사람을 시기하고 있지?”, 불안할 때는 "내가 무엇을 잃게 될까 봐 두려운 걸까?” 그렇게 솔직하게 묻고, 그렇게 천천히 해석해 간다.그래서 요즘 나는 감정을 기록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마음속 깊은 감정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려 한다. 하루의 감정 곡선을 돌아보며 그 안에 쌓인 생각들을 적고는 한다.처음엔 서툴고 막막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굳어 있던 마음이 조금씩 말랑해지는 걸 느낀다. 마음도 근육처럼 쓰지 않으면 굳기에, 감정을 들여다보고 부드럽게 다루는 연습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바꿔놓는다.조금씩 아픈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감기에 걸리는 일이 흔한 것처럼, 정신적으로 아픈 경험도 자연스럽다. 오히려 '나아져야 한다'라는 조급함이 더 깊은 피로를 부르기도 한다.정신 건강의 회복은 완전히 괜찮아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오늘은 그냥 그런 날이었구나" 그렇게 말해줄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이 다시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삶은 완전하지 않기에, 우리는 더 자주 서로의 균열을 알아차리고, 무너지는 마음을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 조금씩 아픈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애써 괜찮은 척하기보다, 내 마음의 작은 울림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자.
2025-07-14 05:00:00젊은의사칼럼

비장해지지 않기

[메디칼타임즈=고신의대 2학년 김민지 ]지난 한 해, 나는 고향 친구들과 자주 교류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의료 대란으로 인해 어수선한 분위기라 약속을 잡지 않았고, 이후에는 금방 해결되리라 여겨 만남을 미뤘고, 점차 상황이 심각해지자 분노와 우울함에 얼룩져 친구들을 볼 여력이 없었다.그렇게 겨울이 왔다. 평소라면 방학이었을 시기였다. 8년 지기 친구들에게 대뜸 연락이 왔다."다들 종강했지? 이번에도 약속 안 잡으면 우리 올해 안에 못 만나. 이번 주에 글램핑 가자"회피하고 싶었다. 여전히 나의 상황은 해결된 것이 없었고, 학기를 잘 마무리하고 온 그들이 부러웠다. 이런 자책과 무력함, 질투가 범벅된 채로 친구들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았다. 여러 핑계를 대며 둘러둘러 거절해봤지만, 어림도 없었다. 결국 우리는 그 주에 글램핑장으로 떠났다.오랜만의 단체 여행이었다. 컨셉도 알차게 정했다. 이름하여 '황조지 컨셉 여행'. 지진희 배우가 황정민 배우, 조승우 배우와 우정 여행을 갔던 사진이 한때 화제가 된 적 있다. 자유롭고 꾸밈없는 모습과 엉뚱한 코멘트… 그 날것 그대로의 분위기가 오히려 순수하고 유쾌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계획은 그 스타일 그대로 여행을 가는 것이었다.예쁘게 꾸미고 인증사진을 남기기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니라, 고기와 술을 왕창 사서 얼굴이 벌게질 때까지 즐겁게 먹고 마시기로 했다. 유치한 게임도 하고 밤늦게까지 수다도 떨며 시간을 보내자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하지만 막상 여행을 떠나니 후회가 밀려왔다. 즐거워 보이는 친구들과 달리 나 혼자만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래서는 내가 친구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망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나도 점차 섞여갔다.우스운 농담을 하고, 웃긴 춤도 춰보고, 별 시답잖은 이야기에도 낄낄대며 웃었다. 학창 시절 이야기를 나눌 때는 꼭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한참 웃다 보니 막힌 혈이 뚫리는 기분이었다.'아, 썰렁한 개그 하니까 애들 반응 웃기다''그래. 나 고등학교 때는 이 반응 보고 싶어서 일부러 이랬는데'서서히 예전의 내 모습을 되찾았고, 그제야 어깨에 힘이 툭 풀렸다. 이렇게 웃을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나는 너무 매 순간 비장했다.'사람 김민지'가 아니라 '의대생 김민지'라는 자아에만 몰입한 채, 일상을 내내 비장하고 심각하게 살았다. 마치 모든 힘을 투쟁에만 쏟아야 그 시간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히고 다그쳐왔다. 하지만 돌아보니, 항상 그렇게 굳어 있을 필요는 없었다.고통만이 정답이 아니었음을.긴장이 풀리자 친구들에게 고마웠다. 별다른 말 하지 않고 무작정 여행을 떠나준 그들이, 그저 함께 웃어준 그들이 참 소중하게 느껴졌다. "얘들아 고마워. 나 사실 힘들었거든. 그런데 이렇게 노니까 좀 낫다" 조심스레 털어놓자 친구들은 피식 웃고는 잔을 내밀었다."그럴 줄 알았어. 원래 그런 건 말이지, 이렇게 훌훌- 크게 크게 웃으면서 터는 거야" 다시 한번 잔이 부딪혔고 시원한 탄산감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호로록, 훌훌.자, 당신도 어깨에 힘을 좀 빼보자.주변도 한번 돌아보고, 일부러 썰렁한 개그를 치며 하루쯤은 우스꽝스럽게 살아보자.모든 순간에 억지로 비장해질 필요는 없다.일상에서 웃고,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는 것.그것이 결국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2025-07-07 05:00:00젊은의사칼럼

읽기의 쓰임에 대하여

[메디칼타임즈=경북의대 2학년 노정연 ]누군가와 자신이 선호하는 것과 선호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넌 어쩌다가 그걸 좋아하게 된 거야?"와 같은, 이유를 묻는 말이다. 언뜻 보기엔 단순해 보이는 말이지만 그리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한 사람의 취향은 그동안의 경험이 누적되어 결정되는 대단히 복잡한 무의식적 판단이며, 그러므로 어떤 선호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설명해야만 한다.특히나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경우라면 그 설명은 한층 더 복잡해지고 길어지며, 종국에는 자기 자신조차 답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나에게는 독서가 그랬다. 나날이 줄어드는 독서 인구를 고려한다면 '왜 책을, 더군다나 문학을 좋아하느냐'라는 말이 그리 유별난 것은 아니지만, 이 질문에 답하기는 늘 난감했다. 어떤 경험들을 얼기설기 엮어낸 조잡한 답변밖에는 할 수 없었다. 당연한 결과다.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허무한 결론으로밖에는 귀결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느샌가 나 또한 같은 의문을 품게 되었고, 사뭇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래서 글로 정리해보고자 했다. 이하는 그에 대한 기록이다.어릴 때부터 책을 손에 쥐고 있던 기억이 유달리 많았다. 부모님의 말씀으로는 아직 글을 모르던 시절부터 동화책을 들고서는 빤히 보고 있었다고 한다. 좀 더 커서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더 이상 어린이 자료실에서 읽을 게 없어 성인 자료실을 기웃대면서도, 단 한 번도 내가 책을 왜 좋아하는지, 무엇 때문에 읽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그러다 고등학생이 되고, 모든 행동에 대입과 관련된 그럴싸한 이유 내지는 핑계를 찾게 되자 책 읽는 시간은 점점 설 자리를 잃었다. 읽고 싶은 책이 생기더라도 일단은 미뤄야 했고, 그마저도 진로와 관련이 없는 책은 가차 없이 탈락이었다. 그나마 사회과학이나 의학 서적은 읽더라도, 문학 서적에는 손도 대지 않게 되었다.다시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대학생이 되고도 계절이 두 번은 바뀐 뒤였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문학은 여전히 아리송했다. 실패했다고 여긴 독서 경험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다. 그렇게 계속 실패하고, 또 계속 읽다 보니 알 수 있었다. 모든 소설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소설은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는 것을.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작가)의 시선으로 다른 사람(등장인물)의 삶을 바라보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면, 자신의 삶 또한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과거의 사건까지 바꾸어 놓을 순 없더라도 그 사건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새로 쓸 수 있다면 그전까지의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그리고 적어도 대다수의 소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을 연습하기에 아주 좋은 교보재가 되어준다. 또한 내가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상상력의 한계를 끊임없이 부수고, 또 넓혀가며 겸손함을 일깨워준다.이러한 한계의 재설정은 매우 중요하다. 아이러니하지만 상상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함부로 단정 짓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또 어떤 일이든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적어도 그런 노력을 할 수는 있다는 것을 소설이 알려주기 때문이다.그리고 문학은 소외된 목소리를 향해 귀를 기울이는 거의 유일한 매체이다. 사회가 바라는 모습에 부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노력하지 않고도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다. 각종 SNS 등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한 모습을 전시하고, 다른 사람의 편집된 일상을 감상한다. 누구 하나 결핍 따윈 모르는 것처럼 완벽하기만 하다.하지만 소설은 정반대이다. 대부분의 시나 소설에는 완벽한 등장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 적어도 하나 이상의 결핍이나 결함을 안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흠결이 오히려 등장인물을 더 매력적이게 하고, 더 나아가 독자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게 만들기도 한다. 모두가 바라는 대로 인생이 흘러가는 것은 아니더라도, 결핍과 결함과 안타까움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또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소설을 통해 배웠다.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은 내가 문학, 특히 소설을 통해 얻은 깨달음 중 극히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것 중에서도 그나마 설명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내가 배운 것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읽기의 쓰임에 대해 정리한다고 해서, 내가 읽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는 않을 것 같다.애초에 이유가 있어서 좋아하는 것은 애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거래에 가깝지 않을까. 나는 읽기를 통해 많은 것을 얻었지만, 한 번도 그런 것을 바라고 읽은 적은 없다. 늘 한 발짝 늦게 깨닫고 있을 뿐이다. 항상 한 걸음 앞서 날 이끌어 주었던 수많은 책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이 글에 쉼표를 찍으려 한다. 아마 평생 고쳐 써야 할 것이므로. 
2025-06-30 05:00:00젊은의사칼럼

내과에서의 마지막 진료일

[메디칼타임즈=경북의대 이진규 졸업생 ]"OO 님, 오늘 저 마지막 진료하는 날이에요"환자와 의사 관계는 특별하다. 친구 같기도, 가족 같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중간쯤에 놓인 듯하다. 환자는 의사가 있어야 병을 이겨낼 수 있고, 의사는 환자가 있어야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애틋하고 소중하다. 환자 없는 의사는 헛똑똑이고, 의사 없는 환자는 그저 아픈 사람일 뿐이다.좋은 의사는 병을 치료하고, 위대한 의사는 환자를 치료한다고 한다. 나는 병을 치료하기에도 부족한 초보 의사라서 좋은 의사가 되기를 매일 꿈꾼다. 하지만, 누구나 인정할 만한 좋은 의사가 되지 못하더라도, 위대한 의사이고 싶다. 병이 아니라 환자를 보고 싶다.그래서 바쁘다. 의미를 좇느라 현실을 희생할 순 없다. 이상을 품되 현실을 외면할 순 없는 법. 의사는 환자의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병원에 수익도 남겨야 한다. 그래야 오래 환자를 볼 수 있다. 그 와중에 환자의 삶에 귀 기울이고, 함께 울고 웃어주는 일은 마치 사치처럼 느껴진다. 어떤 선배 의사는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조언하기도 한다.나는 고집이 센 편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떠돌아다니는 이유들로 타협하지 않는다. 배타적이거나 고리타분한 것은 아니다. 유연하게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다만, 나의 중심이 흔들리거나 나만의 색깔을 잃고 싶지 않을 뿐이다.1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많은 환자들을 만났다. 4살배기 어린아이부터 93세 할머니까지 나이도, 성별도, 성격도 정말 다양하다. 해맑은 얼굴로 손 흔들며 아장아장 걸어 들어오는 아이부터 '아이고 우리 원장님' 하며 함박웃음과 함께 넉살 좋은 얼굴로 들어오는 아주머니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모두 기억난다. 그래서 이직을 앞두고 괜스레 미안한 마음뿐이다."OOO 님, 잘 지내셨어요? 특별히 불편한 데는 없고요?""네 원장님, 잘~ 지냈습니다""그럼 이번 달 약 오늘 받아 가시고요, 다음 달에는 피검사랑 소변검사"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여러 생각들이 내 입을 굳게 닫았다. 다음 달에 나 대신 이 자리에 앉아 있을 다른 의사가 약도 주고, 검사도 처방할 거라 생각하니 괜스레 질투가 났다. 내 사람을 빼앗기는 것 같아서 그랬다. 동시에 느껴지는 환자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미안함에 입술이 말을 듣지 않았다."OOO 님, 앞으로는 술, 담배 줄이시고, 운동 열심히 하시고, 살도 빼시고 꼭 건강하셔야 해요""에이, 원장님. 어디 떠날 사람처럼 왜 그런 말을 해요""제가 있든 없든 건강하셔야죠. 저랑 약속해요. 자, 약속!"환자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도장을 찍고 나서야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무도 몰래 환자분과 마음으로 이별 도장을 찍었다. 그렇게 그날 제 마음에는 다른 얼굴의 도장 수십 개가 찍혔다."원장님, 저 왔습니데이~"남편과 다투고 마음이 불편할 때면 술로 마음을 달래곤 했던 69세 아주머니. 진료실에 들어올 때마다 입술에 검지를 올리고 '우리 남편한테 술 마시는 거 비밀, 그 사람 알면 큰일 나' 하시며 들어오셨던 분이 다시 오셨다.당뇨 치료를 받으시는 분이셨지만, 진료실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걸 참 좋아하셨는데, 특히 남편 욕을 그렇게 털어놓고 가셨다. 한껏 밝아진 아주머니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다음에 올 때는 술을 줄여보기로 매번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해왔다."나는 내과 와서 2원장님이랑 이야기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 밑에 가서도 간호사한테 얘기했어. 눈이 얼매나 이쁘게 생겼다고""아이고, 감사해요. 근데 OOO 님, 저 오늘 마지막 날이에요""엄마야, 어디로 가는데예? 나도 따라가야겠다"나는 아주머니의 눈을 마주 보며 아쉬움 섞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곧 서울로 올라가요""원장님… 우리 원장님… 우짜노 원장님 보는 재미로 오는데, 인연이 있으면 또 언제 안 보겠어요. 사랑합니데이"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매주 교회에서 듣는 그 단어를 진료실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마음에도 따스함이 은은하게 차올랐다."저도 사랑해요. OOO 님, 건강하시고 행복하게 지내시다가 또 뵈어요"우리는 만나고 헤어진다. 만날 땐 반갑지만, 헤어질 땐 아쉽다. 더 이상 일상을 함께할 수 없어 그렇다. 그래서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내게 소중했던 그들이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한, 그들과 마음만은 함께할 수 있다. 가끔씩 생각날 때면 마음속 페이지를 펼치고 책갈피가 꽂힌 부분을 열어볼 수 있다. 그렇게 위대한 의사가 되어가리라 믿는다.언젠가 들었던 유명 만화의 명대사가 떠오른다."사람은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심장이 총알에 꿰뚫렸을 때?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맹독 버섯 수프를 먹었을 때? 천만에! 사람들에게 잊혀졌을 때다"환자들은 나를 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웃음과 눈물, 아픔과 기쁨을 마음에 새기고 간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치료이자, 첫 번째 치료일지도 모른다.그렇게 나는 내과 진료실을 떠났다. 빈 의자 하나가 남았지만, 그곳에 남은 추억은 가득했다. 문을 닫으며 돌아본 그 자리에는 수많은 얼굴들이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이별을 뒤로 내가 걷고자 하는 길로 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2025-06-23 05:00:00젊은의사칼럼

누군가를 닮은 나, 나를 닮은 누군가

[메디칼타임즈=가톨릭 관동의대 배지섭(본과 1년) ]"당신은 올해 어떤 사람을 닮고 싶으신가요?"나는 매년 초, 닮고 싶은 인간상을 상정하는 습관이 있다. 이는 곧 나를 정의하는 방식이자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정립하는 나만의 나침반이다.그런데 요즘 '나'를 정의해 나가는 과정이 조금은 벅차다. 많고 많은 일들이 한 해를 관통해 온 2024년이었기에, 선뜻 어느 한 사람을 상정하기가 힘든 2025년 연초였던 것 같다."나부터 나를 잘 알아야 합니다. 나부터가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수많은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속으로 곱씹었던 말들이다. 자기계발서나 인문학 서적들을 읽다 보면 언젠가 내가 원하는 목표를 뚜렷하게 그려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도움은 되었겠지만, 많은 이들이 느끼듯 그 모든 내용이 내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그렇게 자기계발서를 읽어 온 지도 어느덧 1년이 넘어가던 2025년 2월, 설날 연휴 아침에 뜻밖의 인스타그램 DM이 도착해 있었다."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제가 2024년에 만났던 사람 중 존경하는 사람 탑 5에 들어요. 온 마음 다해 형의 앞날을 응원합니다. 너무 기뻐요, 형을 알게 돼서"너무나 뜻밖의 선물이었다. 소위 말하는 받침에 'ㅅ'이 들어가는 20대 중반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2025년이 된 지금, 이 친구의 새해 인사는 내게 있어 수없이 읽었던 자기계발서 이상의 울림을 선사해 주었다. 문득 왜 그런지 분석해 보고 싶어졌기에, 내가 상정했던 인간상을 하나씩 꼽아 보며 과거를 돌아보았다.2022년에는 동기와 의대 선배들을, 2023년에는 함께 일한 동료이자 친애하는 조교진을, 2024년에는 단체를 이끄는 대표님들과 내 진로에 뼈저린 조언을 건네주신 다양한 교수님들을 롤모델로 삼으며 살아왔다. 어느덧 수많은 인간상을 마주해 온 2025년 초, 과연 올해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은 누구일지 스스로에게 자주 묻고 또 고민하던 시기였다.닮고자 하는 인간상을 상정하면, 그 사람을 동경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며, 어느새 내 바운더리 깊숙한 곳에 안착시켜 놓는다. 그리고 한 해가 마무리될 즈음엔, 연초에 떠올렸던 그들의 실루엣과 연말 나의 실루엣이 얼마나 겹쳐 보이는지, 어쩌면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에서였을까, 되새겨 보곤 한다.해마다 목표로 하는 인간상이 달라졌다는 것은 해를 거듭할 때마다 내 마음속의 인간상에 대한 시선이 산뜻하게 불어오는 봄바람에 흔들리듯 조금씩 일렁였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아니, 어쩌면 이제는 누군가를 동경한다기보다는 그저 나 자신과의 대화를 반추해 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설날 연휴에 받은 위의 DM 한 통은 이러한 내 생각에 확신을 심어주었다.이번 2025년의 첫 상정은 다음과 같다. 내가 누군가를 닮고 싶다고 판단했듯, 어느 어여쁜 어린 영혼이 나를 닮고자 하는 인간상으로 삼았을 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나 자신을 가꾸는 것이다.이는 지난 2024년 하반기부터 활동해 온 비영리단체 투비닥터의 슬로건과도 부합한다. '의대생과 젊은 의사의 성장 러닝메이트'. 되돌아보면 내 주변에는 나로 하여금 나의 포텐셜을 터뜨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내가 받아 온 것들이 많기에, 이제는 나 또한 후학에게 그들의 내재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참된 '기회'를 선물해 주고 싶다.내가 추구하는 인간관계의 형상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단 두 줄로 표현할 수 있다. 나를 알고,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효용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동시에 사람과의 생각 교류를 도모할 수 있는 편안하고도 진중한 이미지의 매개체로서 작용하고 싶다.'기회'의 되물림이 빛나는 이유는 나에게서 기회를 받은 후학이 그들의 후학에게 또다시 새로운 기회의 장을 선물해 주기 때문일 터. 다름 아닌 '인적 자원의 교류를 도모하고, 이를 선순환으로 연결 짓는 것'. 사람을 이어 주고, 사람의 잠재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려고 한다.그러한 과정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사람들과의 교류 속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재정의하며 한층 더 성장하는 뜻깊은 시간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와 함께 발맞춰 걸어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경험인지 잘 알기에, 이제는 내가 그런 동반자가 되어 보고 싶다. 언젠가 누군가 나를 떠올리며 "그 사람을 알게 되어 기뻤다"고 말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오늘도 나 자신을 가꾸어 나가려 한다.
2025-06-16 05:00:00젊은의사칼럼

Bye bye, my comfort zone

[메디칼타임즈=단국대 본과 3학년 박정은 ]더 많은 사람에게 닿고 싶다.의과대학 입학 4년 차에 내가 내린 결론이자, 창업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이유였다. 환자 한 명 한 명과 마주하는 일도 분명 의미 있지만, 진료실 너머 사회 전체에 파장을 일으키고 싶은 갈망이 있었다. 의료를 통해 더 넓게, 더 깊숙이 세상에 스며들고 싶다는 생각이 점차 커져 갈 때, 반짝이는 단어들을 찾았다. AI, 디지털 헬스케어, 빅데이터 — 기술이 의료와 만났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은 무궁무진했고, 상상하자니 가슴이 뛰었다.물론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 반짝이는 것들 대부분이 사실은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것들이라는 걸. 가까워진 듯하면 멀어지고, 붙잡으려 하면 막상 거기에 없는 상황이 부지기수라는 걸. 하지만 그땐 알지 못했기에, 그 잠재력에 매료된 나는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 발을 들이며 관심사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회사도 다니고, 직접 프로덕트도 기획하고 제작해 보며 부딪혔다. 그러다 올해 초, 부진한 기업들이 사업을 철수하듯, 나 역시 헬스케어 도메인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오늘 칼럼에서는 그런 내 중단과 방향 전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당연한 서비스가 만든 역설한국 의료 시스템의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이 분야를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한 지 몇 개월이 지나서였다. 한국에서 의료는 '당연한' 서비스다. 우리나라에서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하루가 24시간이다'만큼이나 자명한 명제다. 전 국민이 누리는 원활한 의료 접근성은 분명 자랑스러운 성과이고, 현대 국가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이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은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에서 난제이자 큰 제약으로 작동하고 있다.OECD 의료 이용률 최상위권과 치료 중심의 의료 시스템. 이는 미래 의료의 기치로 손꼽히는 4P(Preventive, Predictive, Personalized, Participatory) 중 첫 번째 P인 예방(Preventive) 의료와 대치되는 우리나라의 의료 이용 행태를 보여준다. 이렇듯 구조적 한계와 치료 중심의 사고방식이 깊이 뿌리내린 환경에서는, 예방 중심의 서비스 모델이 성공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B2C 디지털 헬스케어 서비스가 '예방과 관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분명한 제약이다.게다가 낮은 진료비와 높은 의료 접근성은 사용자 설득의 난도를 배가시킨다. 치료에 비해 예방과 관리는 장기간에 걸쳐 비용을 투자해야 하며, 그 효과를 가시적으로 확인하거나 체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혈당 관리, 저속 노화 등 특정 키워드로 건강관리에 대한 관심이 증대한 것은 반가운 변화지만, 이를 위해 장기적으로 비용을 지출하는 것에 대한 소비자 저항은 여전히 크다.공급자와 수요자 사이의 이해 불일치더 근본적인 문제는 서비스 자체의 설득력 부족에 있었다. 대부분의 디지털 헬스케어 제품은 내게 공통적인 생각을 들게 했다. '사용하면 분명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굳이 돈을 지불하고 싶지는 않다.' 심지어 무료로 제공된다 해도, 지속적으로 사용할 만큼 매력적이거나 효과적인 서비스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특히 의료인이 주도하는 프로젝트에서 이러한 문제가 더욱 두드러진다. 공급자 중심적 사고가 시장 검증 과정을 생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의료인은 자신의 임상 경험과 통찰을 바탕으로 제품을 기획하고 곧바로 제작에 착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의 '꼭 필요할 것이다'라는 뜨거운 확신은, 사용자 입장의 '필요하니 비용을 지불해야지' 하는 차가운 판단과 쉽게 일치하지 않는다. 둘 사이엔 보통 생각보다 훨씬 큰 간극이 존재한다. 이러한 불일치는 자생 가능한 시장성을 보장하지 못하고, 기술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하는 제품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는다.새로운 길이런 어려운 문제 조건에도 불구하고, 분명 이 미션을 해결해 낼 사람은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 난제를 타개할 만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내게는 없었고, 산업에 대한 흥미도 전과 같지 않았다. 결국 나는 지금 당장은 이 분야가 나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나의 길이 벽에 부딪혔다면 곧장 다른 길로. 그렇게 나는 의료 밖의 다른 서비스 분야를 탐색하게 되었다.IT 창업 동아리에 들어간 건 그 과정의 첫걸음이었다. 거기서 나는 내가 별로 관심 없다고 착각했던 것들과 마주했다. 생산성 도구, 플랫폼, 커머스, 인슈어테크 등 IT 산업의 다른 영역들을 살펴보니, 디지털 헬스케어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무엇보다 명쾌했다. 사회재적 성격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서비스 도메인에서는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시장 논리가 훨씬 깔끔하게 작동했다. 그 점이 매력으로 다가와, 현재는 여러 분야의 서비스를 접하고 즐겁게 흡수하고 있다. 의료 말고도 이렇게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재미가 있고, 사람들의 일상에 녹아 있는 다양한 영역의 산업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는 일이 내게는 꽤나 흥미진진하다.초심자가 되어 얻은 성장의 기회'의대생'이라는 간판만으로 실체 없는 도메인 전문성이 어필되었던 이전과 달리, 홈그라운드를 벗어난 나는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초심자의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좋다. 아니, 이쪽이 더 좋다.이전까지 나는, 많은 의대생들이 흔히 빠지는 '도메인 전문성을 갖췄다는 착각'에서 자유롭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생각 자체가 착각이었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서비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근거 없는 자신감과 낙관주의에 기대어 곧바로 기능 기획에 들어갔다. '이건 분명히 필요할 거야'라는 주관적 판단과, 내 입맛에 맞는 자료들을 근거 삼아 확신을 쌓았다. 방향과 결론을 미리 정해두고, 그에 맞는 이유를 끼워 맞춘 셈이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말로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인가?'라는 질문을 출발점으로 삼고, 내 아이디어가 실제로 시장에서 검증 가능한 구조인지부터 차근차근 따져 본다. 그것은 이 분야가 무엇보다 고객 경험을 중시하고 강조하는 덕분이다.이 과정을 지나며 자꾸 떠오르는 문장이 하나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본래는 날카롭고 파괴적인 메시지를 가진 문장이지만, 나는 그것을 조금 다르게 읽어 본다. 나를 다시 써내려가기 위한 파괴. 재조립을 위한 해체. 그를 위해 나는 익숙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흔들고, 경계를 파괴해 본다. 편안했던 소속감, 너무 익숙한 길, 의심해 본 적 없는 지식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일찍 정해놓은 미래의 대본 같은 것들에 맞서서.연고 없는 길을 가는 건 여전히 낯설고, 불확실성을 선택하는 일은 언제나 두렵다. 하지만 그 두려움 속에는 어떤 선명한 짜릿함이 있다. 진짜 성장은 언제나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법이고, 안전한 곳에만 머무는 삶은 결코 나를 더 크게 만들 수 없으니까. 사뭇 비장하게 외쳐 본다. Bye bye, my comfort zone!
2025-06-09 05:00:00젊은의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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