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양의 느낌
[메디칼타임즈=순천향의대 3학년 오명인 ]당근 마켓에서 노란색 아레나 오리발(덕핀)을 샀다. 오리발은 신발과 달리 치수가 다양하지 않아 발에 꼭 맞기 어려운데도, 눈대중으로 산 오리발은 이상하리만큼 발에 꼭 맞았다.새롭게 해보려고 했던 것들이 모두 마음대로 되지 않아 그 주에 유일하게 성공한 일이 '오리발 당근', 그것뿐이었다. 수영 강습에서 필요해 구매한 것이었지만 오리발이 손에 들어오니 갑자기 바다 수영이 하고 싶어졌다. 그것도 맑고 깨끗하고 초록빛이 도는 제주 바다가 좋을 것 같았다.그렇게 비행기 출발 열두 시간 전에 비행기표 결제 버튼을 눌렀다. 나의 계획형 친구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큰 배낭 하나에 모든 짐을 넣고, 사놓고 읽지 않은 <대양의 느낌>도 가방에 끼워 넣었다.비행기에서 펼친 책의 서론에서 저자는 대양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이 세상 밖으로 떨어질 수 없고, 우리는 완전히 그 안에 있다는 느낌'. 바다를 볼 때, 우리는 세계와 연결되어있는 유기성을 느낀다는 것이다. 비행기 창문 밖으로 대양을 내려다보며 과연 내가 유기성을 느끼는지 시험해 보았다.이미 땅은 보이지 않고, 사방으로 파란 물과 그 위의 잔물결이 내가 볼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내가 느끼는 것은 고독감에 가까웠다. 나에게 바다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가 더 편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공간이자, 성인이 된 후에도 혼자가 될 필요가 느낄 때마다 찾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 서론에서부터 공감에 실패한 채, 더 읽어볼 시간도 없이 비행기는 순식간에 착륙했다.제주도는 유명한 관광지인 것에 비해 대중교통 상황이 좋지 못하다. 버스를 한 시간이나 타고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주택을 개조한 조그만 게스트하우스로, 흰 페인트칠이 되어있는 벽이 지중해를 연상시켰다.공용공간에 나 있는 큰 창문으로 제주의 바다가 한눈에 담겼다. 푸른 바다와 맑은 하늘은 경계가 불분명해 보일 정도였다. 숙소에 묵는 사람은 자전거를 무료로 빌릴 수 있었기에, 나는 수영복과 수경, 오리발만 간단히 챙겨 자전거로 20분 거리에 있는 포구로 출발했다.휴가철이 지나서인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파도가 꽤 강해 보였지만 망설이지 않고 바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생각보다 강한 파도에 오리발을 낀 발이 자꾸 돌아가서 방향을 잡기가 어려웠다.결국 오 분 만에 오리발을 바위에 올려두고 자유를 얻은 발로 한결 가볍게 잠수 또 잠수했다. 멀리 헤엄쳐 나가도 힘을 풀고 떠있으면 파도가 포구 가까이로 데려다주었다. 스노클링을 하려고 온 것은 아니었는데 스노클링 장비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면 색색의 물고기를 볼 수가 있었다. 나는 제주 바다에 그렇게 다양한 물고기가 있는 줄 몰랐다.노을이 질 때쯤, 바다가 잘 보이는 카페에 앉아 내가 본 물고기들을 기억을 더듬어 그리기 시작했다. 기억은 언제나 불확실하지만, 인상은 강렬하기 때문에 기억과 인상 사이의 스케치를 해 놓으면 몇 년이 지나도 쉽게 추억에 젖을 수 있다.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다, 문득 수영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 이 하루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텅 비어서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몰랐던, 채울 필요도 느끼지 않았던 유년 시절부터 시작한 것들로, 마치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의례 같았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나는 이제 비어 있는 하루를 불안해하는 어엿한 현대인으로 자랐다.하지만 과거는 현재로 흐르고 현재는 또 미래로 흘러 나는 순리대로 과거에 했던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결국 나의 삶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던 마음에 도착한 곳에서 과거를 이어서 살고 있다는 것만 확인하게 된 셈이다.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이전의 삶을 이어서 살 뿐, 결코 새로운 삶을 살 수 없다' 우리는 이전의 삶과 우리를 끊어버릴 수도, 우리를 이 세상 밖으로 던져버릴 수도 없다.이 말은 엉망 같은 현재를 초기화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실망을 안겨주겠지만, 지금껏 쌓아온 것이 무로 돌아갈 일은 없다는 응원이기도 하다. 마음에 들든 혹은 마음에 들지 않든 나의 과거를 이어서 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삶의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돌아가면 여행 때문에 밀린 일을 누군가 대신해 놓았거나, 풀리지 않던 일이 거짓말 같이 해결되어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신 내가 완벽하지 않게 일을 해결하고 또 그다음 일을 해결할 것이다. 그러다 지친 마음으로 다시 홀로 바다를 찾으면 견고한 모습으로 나를 다시 해안가로 밀어주리라는 기대감, 그것이 내가 느끼는 대양의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