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개봉한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지금껏 홀로코스트를 다루어 왔던 수많은 영화와는 전혀 다르다. 1944년, 가장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는 그 어떤 격정적인 전투나 슬픔의 절규도 등장하지 않는다.
전쟁하면 으레 떠올리기 마련인 폐허는 전혀 그려지지 않고, 오로지 아름다운 강변과 널찍한 정원, 수영복 차림으로 피크닉을 즐기는 단란한 한 가족의 일상이 이 영화를 지배할 뿐이다. 아이들의 귀여운 말썽이나 부부의 말다툼까지, 이 저택은 그들의 삶 그 자체다.
영화의 역설적인 부자연스러움은 오로지 소리로만 들려온다. 나치 친위대 장교 루돌프 회스의 사저의 담장 너머, 아우슈비츠의 음산한 불협화음으로만.
독재나 전쟁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들을 묘사하는 창작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들이 일상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정말 그것들이 끔찍한 이유는 그 안에서 삶이 여전히 연속되기 때문이다.
세계 2차 대전 한복판에서도, 폭격을 당해도, 자연재해가 덮쳐와도 사람들은 그 안에서 저마다의 일상을 찾아내곤 한다.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추상적인 장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생활을 바꾸는 힘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오랜 역사 동안 늘 정치가 인류사의 중대한 화두였던 게 아닐까.
나는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학부를 졸업했다. 학부 1학년 1학기 때 미국의 45대 대선이 치러졌다. 결과가 나온 날 학교에서 이런 이메일을 받았다. '선거 결과에 우울감 등을 느끼는 학생을 위해서 상담이 진행되고 있으니 필요한 학생은 신청하기를 바랍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만큼 대선 결과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 시민권자조차 아니었던 어린 내게 정치는 남의 일이었다. 대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그들은 내게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구 반대편 높으신 분들의 권력 싸움이 내 삶에 미치는 여파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나는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미국에서는 시민권자가 아니었기에 그랬다는 핑계가 있었다면 의학전문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고 귀국한 후에는 그조차도 없었다. 졸업하자마자 팬데믹이 전 세계를 덮쳤고 보건의료 재난 상황에서 또다시 정부와 의료진들이 협력하고 갈등한다는 뉴스가 송출되는 와중에도 나는 대학원 수험을 해야 했다.
면접을 준비하며 보건학도 역학도 조금씩 공부했지만 그렇다고 의료 현장이나 정치적 견해들이 피부로 와닿지는 않았다. 그런 주제가 면접에 출제된다는 건 분명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의료인을 사회가 원했다는 뜻이었을진대 아이러니한 일이다.
의학전문대학원에 들어오고서는 매일매일 공부에 치여 사느라 안 그래도 크지 않던 관심이 거의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선거에는 참여했지만, 매번 신경 쓰기에는 피곤한 일이 바로 정치였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의대생과 의사들도 비슷했을 거라 추측한다.
쏟아지는 공부에 피로에 지친 와중에 발표된 정책들을 알아보고 비판하는 일은 쓸모없고 피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외면해 왔던 대가가 결국 내 일상에까지 덮치고 만 것이다.
역시 나치에 관한 유명한 시가 있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금언이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작금의 사태는 일견 이 시를 떠오르게 한다. 지금껏 내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했던 정치야말로 실은 내 일 그 자체였다는 귀중한 사실을 깨닫는 나날이다. 분명 누군가의 일상에 이미 넘실대고 있었을 파도가 이제는 나에게까지 온 것이다. 거기에 발을 적신 후에야 이 풍랑이 우리 모두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노라면 문득 부끄러움을 느끼고 만다.
환자를, 생명을, 삶을 다루는 의학도로서 이토록 '사람'에 무지했다니. 기계적인 의술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보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현대 의학이라면, 인간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 또한 당연히 관심을 가지고 고찰해야 할 대상일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대란은 의료인들에게 이러한 중요성을 깨닫게 만들어 준 중대한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의 정원 너머, 비명을 가두어 둔 담장은 무엇이었을까. 시멘트와 콘크리트보다도 강고한 그것은 의료인들의 무관심인 동시에 예쁜 저택의 탈을 쓴 의료 시스템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의료인들이 벽 너머 정치를 외면해 온 것처럼 벽 밖의 사람들에게도 의료인들은 '일반적이지 않은', '설명하기에는 너무 바쁜' 소음이었을지도. 지금 이 순간마저도 수많은 언론과 그 뒤의 결정권자들이 대한민국 의료를 이해하지 못한 채 기사를 쏟아내고 있고 의료진들 역시 지금껏 외면해 온 소통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몰이해가 쌓아 온 공고한 간극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더디게나마 그 벽을 무너뜨릴 기회인 것은 아닐까.
눈과 귀를 열고, 피와 살뿐만이 아닌 진짜 인간을 볼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으로, 의료인을 의료인으로 만들어 주는 가장 중요한 가치일 것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말해 주기를 바란다면 나 또한 누군가를 위해 말해야 한다. 나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지켜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한 첫걸음은 책에서 눈을 돌려 세상을 보는 것이다. 활자가 아닌 소리를 듣고 살아 숨쉬는 사람들을 느끼는 것이다. 바쁘고 피곤하고 복잡하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정치로부터 눈을 돌려왔다면 이제는 직면하도록 하자.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진정한 의미의 '소통'에 대해 고민하면서, 벽 너머 그저 성가신 소음이 아닌 그들의 진짜 목소리를 듣고 우리 또한 우리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는 법을 연습할 때다. 그 첫 단계는 적극적으로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뉴스를 보고 꾸준히 의견을 개진하고 우리와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우리를 이해시키는 만큼 우리 또한 그들을 이해할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괴로운 시기지만 어쩌면 세상 밖으로 나와 스스로를 환기할 기회일지도 모르는 이 시간을, 내가 몸담은 사회와의 연결점을 새로이 만드는 데 사용하고 싶다. 그리하여 우리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의 경계가 무너지면 비로소 우리는 진정 사람을 보는 의사라고 스스로를 부를 수 있으리라. 사람을 보기 위해서. 소음이 아닌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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