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괴감이 느껴지죠. 내가 이 말을 하는게 맞나. 하지만 이해 못할 부분도 아니에요. 일단은 다 살아남아야 뭘 하든 할꺼 아니에요."
한 대학병원 노교수의 말이다. 그는 최근 자신을 찾아온 환자의 상당수를 다른 교수에게 보내고 있다. 병원에서 야심차게 도입한 새 기기 활용에 전방위적 총력전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기기는 차세대 제품으로 이미 여러 국가에서 안전성과 유효성이 입증된 치료법이다. 환자에게 유용한 옵션이 될 수 있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 선택지가 반 강제적으로 하나에 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첨단 기기를 구비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고 이른바 본전을 뽑아야 하니 병원 차원에서 몰아주기가 자행되고 있는 셈이다.
관련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교수들도 사실상 속수무책이다. 참외도 열심히 키웠고 수박도 열심히 키웠지만 답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키위다.
그러니 수박을 키우고 참외를 키운 교수들은 환자를 키위 농장이 있는 교수에게 보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환자에게는 참외가 더 싸고 맛있지만 일단은 키위가 더 좋다는 포장을 해야 한다.
그렇다보니 이른바 유튜브와 소셜네트워크(SNS), 블로그 등에도 온통 키위 얘기밖에 없다. 환자들도 이걸 보고 왔으니 차마 참외를 내놓을 수 없는 경우도 생긴다. 전문가로서 안타깝지만 방법은 없다.
이것이 2025년 한국 의료의 현실이다. 이는 비단 이 대학병원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다.
병원은 키위를 매장 전면에 배치하고 환자들은 키위를 찍고 병원에 방문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선택지는 사장당한다.
이는 비단 대학병원의 잘못도 아니다. 개복을 하면 적자가 나고 로봇을 돌리면 수천만원의 흑자가 나는데 경영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개복수술을 한다는 교수를 말리는 것은 당연한 처사다. 환자에게 더 좋은 선택지라 해도 말이다.
항암 요법을 하면 흑자가 나고 전치적 절제술을 하면 적자가 나는데 굳이 위험도 더 높은 절제술을 강행할 이유가 없다. 환자에게 필요한지는 의문이지만 인공지능 솔루션을 일단 달아놓는다.
상황이 이러니 그 선택지에서 제외된 이른바 미운 오리 과일들은 키울 밭 조차 없어지고 있다. 이제 당신이 은퇴하면 병원에 개복할 의사가 남아있지 않다는 또 다른 노교수의 말에 여운이 남는 이유다.
이제 뒤틀릴대로 뒤틀린 우리나라 과일 시장은 이렇게 흘러간다. 어느 순간 온통 키위만 남은채 참외 밭도, 수박 밭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때가 되면 또 모르겠다. 참외 밭 의무화 정책이 나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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