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진료를 받지 못해 의료기관을 전전하는 '응급실 뺑뺑이'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가운데 사법 리스크가 현상을 부추기는 주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의료분쟁 발생 시 법원이 완벽한 진료, 대응 상황을 가정하고 판결을 내리기 때문에 응급조치로 태아를 살려도 뇌성마비에 대한 책임으로 12억원을 물어줘야 하는 등 불합리한 상황이 방어진료를 선택하는 동기로 작용한다는 것.
법원의 자문 과정에서 전문성 여부도 도마에 오르는 까닭에 각 분야 전문 의료진의 참여 보장 및 응급실 도착 시 환자 상태, 의료인의 업무 부하, 병상 포화 수 등을 반영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23일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는 그랜드워커힐 호텔에서 정책 워크숍을 개최하고 지속되는 응급실 뺑뺑이 및 전공의 지원율 하락에 대한 해법을 모색했다.
'고뇌하는 소아응급의료 미래를 향한 길'을 발표한 대한소아응급의학회 류정민 부회장(서울아산병원)은 "2017년 112%에 달했던 소청과 전공의 지원율이 이대목동 사건 발생과 이로 인한 2018년 의료진 기소 이후 급감했다"며 "작년엔 25%까지 떨어져 위기의식을 응급실에서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소아응급의료의 특성은 계륵보다 약간 못한 존재로까지 전락했다"며 "근본적인 원인은 극심한 저수가 환경인데 응급의학과는 성인 환자들에 치하고, 소아청소년과는 야간을 커버할 인력이 부족해 서로 눈치를 보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건강보험 재정 고갈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의정 갈등 사태로 전공의 지원 급감 사태는 비가역적으로 고착화돼 결국 응급실 뺑뺑이를 악화시킬 것"이라며 "실제로 최근 경련지속증을 앓던 소아가 갈 데가 없어서 한시간 동안 계속 경련을 앓는 응급실 뺑뺑이 사태가 또 불거졌다"고 꼬집었다.
국정감사에서도 소아응급진료가 가능한 응급의료기관이 10곳 중 1곳도 안 된다는 지적이 나왔고, 비교적 경증에 속하는 소아환자들은 아동병원으로 가고 있지만 아동병원도 과부하가 걸리고 있어 근본적인 대책 마련 없이는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류 부회장은 응급실 뺑뺑이를 만든 4대 원인으로 ▲사법리스크 ▲배후 진료 불가 ▲응급실 과밀화 ▲중앙 응급 환자 분류/이송/배정 시스템 부재를 지목했다.
그는 "소아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누군가가 받아주긴 해야 하는데 받아주는 사람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며 "현재처럼 모든 책임을 최종 진료자가 부담하는 구조에선 응급 처치 후 광역/수도권/권역 상황실에 연락한 시점 이후에는 완전 면책이 있어야 응급실 수용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고 밝혔다.
그는 "사망을 포함해 정당한 치료 과정의 리스크를 인정하는 실효성 있는 의료사고특례법이 필요하다"며 "환자 사망을 포함해 공제 보험 특례를 적용하고, 자동 개시되는 의료분쟁조정절차를 폐지하거나 개정, 법원의 의료 분쟁 재판 자문 과정의 전문성을 개선해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행 의료사고로 인해 환자 사망, 1개월 이상 의식불명, 중증장애를 입은 경우 의료분쟁조정절차가 자동으로 개시되는데 조정신청액 1억원일 경우 신청자는 16만원의 수수료만 내면 나머지는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다 알아서 해주기 때문에 이를 안 할 이유가 없다는 게 그의 판단.
류 부회장은 "의료진은 결국 중재원 중재에 걸리거나 법원에 소가 제기되거나 한국소비자원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에 조정이 신청되거나 세 가지 중에 하나는 반드시 걸리게 돼 있다"며 "복지부에서 의료사고가 아니라고 해 주는 경우만 각하가 되지만 그렇게 해줄리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의료사고 감정 시 의료인 2인이 들어가는데 누가 들어가는지, 어떤 자격인지, 어떤 학회가 관여하는지, 그 분야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지 전혀 검증이 안된 상태에서 하기 때문에 객관화도 필요하다"며 "판결 시에는 도착시 환자 상태, 의료인 능력과 업무 부하, 적절한 배치 여부, 환자 내원 전후 시간당 방문 환자 수, 환자 내원 당일 의료인 대비 병상 포화 수, 동시에 처치가 필요한 중증 환자 수의 반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각 법원에서 관습적으로 주변 자문 병원을 지정하는데 자문 의료진의 적절성 판단 기준에 대한 성문법적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며 "소수 자문의사의 의견에 치우치지 않도록 각 분야/학회 법제위원회의 적극적 참여와 전문성이 인정돼야 하고, 의료 분쟁 시 진료 당시 환경 평가 표준 도구 개발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응급조치로 태아를 살렸는데 뇌성마비로 12억을 배상하라고 하거나 응급실 심정지 환자를 살렸지만 후유 장애에 5억원을 배상하라고 한 법원의 판단들은 완벽한 상황에서 완벽한 의료행위를 가정하고 내린 일종의 오판이라는 것.
해외의 경우 고의없는 과실은 형사처벌이 면제되지만 유독 국내에선 환자 상태 및 의료 여건, 상황에 대한 반영 없이 의료진의 개인 책임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잣다는 지적이다.
류 부회장은 "소아를 진료할 후대 인력 확보를 위한 전제 조건은 사법리스크 완화와 전문성 인정, 보상 현실화, 응급의료 시스템의 정비"에 있다"며 "이런 지원은 골든타임과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소아응급 시스템은 24시간 365일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인력 공백 발생시 기하급수적으로 업무 증가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전공의 지원율 하락으로 인력 수급도 어려워 업무 증가를 불러오고 이는 다시 지원율 하락을 불러오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고 지원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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