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 사태 이후 응급의료 현장의 중증 환자 대응력이 급감하고 전문의 이탈이 가속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정상화하기 위해 사법 리스크 해소와 정부의 실질적 책임 인정, 현장 중심의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는 응급의학과 의사들의 요구가 나온다.
29일 대한응급의학의사회가 'Far from Home'을 주제로 2025 KEMA 학술대회 기자간담회를 열고, 응급의료 현장은 아직도 정상화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1년 반 넘게 이어진 의정 갈등으로 전공의 사직과 전문의 이탈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인력 공백에 더해 사법 리스크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다는 우려다.
이날 참석한 응급의학의사회 임원들은 전공의 이탈 이후 상급종합병원의 중증 응급환자 대응 능력은 급격히 약화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로 인해 환자들이 지역 중소병원으로 밀려나면서 응급의료 질 저하와 하향 고착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들 임원은 "코로나 때부터 배후 진료과가 눈에 보이게 무너지는 걸 목격했다. 그래서 퇴근도 못 하고 병원에 나와 진료하는 상태다"라며 "지금도 이런 상황이 별로 변화되지 않았다"며 "중증도가 높지 않은 환자들도 빠르게 자원이 투입됐으면 더 좋은 예후를 보였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눈앞에서 물이 새고 있는 걸 느끼는 건 결국 환자들"이라고 전했다.
응급의학의사회 이강의 대외협력이사는 "사태 초기 정부가 응급실 이용 자제를 유도하면서 한동안 환자가 줄었지만, 지금은 국민 체감도나 경각심이 옅어져 다시 늘고 있다"며 "인력 부족 상황에서 진료량만 늘고 있어 의료진 피로도는 오히려 더 쌓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위기를 넘긴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현장 소진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부연했다.
의료 사태 이전까진 그나마 60~70점 수준을 유지하던 우리나라의 응급의료 체계가, 지금은 40~50점의 낙제점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진단이다.
특히 응급의학의사회 김재혁 정책이사는 본회 비상대책위원회 성명서를 통해, 현 상황을 방치하는 것은 행정부가 국민의 안전을 외면하는 중대한 직무유기이자 방임이라고 비판했다. 현재 상급종합병원마저도 전체적인 진료 역량이 저하되는 등 비단 응급의료만의 문제가 아닌 전체 필수의료의 명맥이 위태롭다는 우려다.
또 그는 현재의 의료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의사 집단행동을 '재난'으로 규정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해체와 보건의료 위기 '심각' 단계 해제를 요구했다. 단순 회의만 반복하며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한 만큼, 이제는 실질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판단이다.
이어 전공의 사직 초기 정부의 강제 명령과 회유로 신뢰가 붕괴됐다며, 정책 실패를 명확히 인정하고 관련 책임자에 대한 사과와 문책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보건복지부 장관을 조속히 지명하고, 의정 갈등 해결을 새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응급의료 개혁의 핵심 과제로 ▲응급실 과밀화 해소 ▲최종 치료 책임 구조 개선 ▲취약지 인프라 확충 ▲사법 리스크 면책 논의 등을 제시하며, 이를 논의할 실질적 협의체 구성이 시급하다고 강조다. 현장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다면 어떤 제도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비판이다.
응급의학의사회 이형민 회장은 "지금 상황은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새로운 뉴노멀을 이야기해야 할 때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짐은 더욱 커질 것이다"라며 "이 일의 시작부터가 정치적인 의도였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꼬이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문제를 개선하려고 문제 해결을 미루는 것은 오판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더 큰 비용을 지불하고 더 해결이 어려워지기 전에, 보건복지부 장관을 하루빨리 지명하고 조속히 해결에 나서야 한다"며 "중앙의 재난도 아니고 안전 대책도 없었다. 지금은 회의가 아니라 결정이 필요한 때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해체해야 하며, 보건의료 위기 '심각' 단계도 즉시 해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응급의료 현장의 사법 리스크 문제 해결 없이는 문제 해결이 요원하다는 우려도 함께였다. 이번 사태로 인한 전공의 사직이 단기적인 문제라면 사법 리스크는 장기적인 이탈 요인이라는 지적이다. 응급 환자 진료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가항력적 결과에 대해 형사적 책임까지 묻게 되는 구조가, 의사들로 하여금 응급실과 중환자실 근무를 회피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
응급의학의사회는 이 같은 문제 해결을 위해 면책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결과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해당 진료 과정에서 충분한 노력을 다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또 그 예시로 미국의 엠탈라(EMTALA) 법과 같은 제도의 법제화 필요성도 함께 제기했다. 이 법은 응급 환자에게 진료를 보장하는 한편, 의사 역시 정당한 진료를 한 경우 법적인 책임에서 보호하는 것이 골자다.
환자가 느끼는 의료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과 두려움은 단순히 '치료받을 권리'만 보장하는 것으로는 해소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오히려 의사가 충분한 의학적 판단과 조치를 다한 경우엔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는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의료진뿐 아니라 국민 입장에서도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는 것.
이와 관련 응급의학의사회 김찬규 대변인은 "보통 우리가 비행기를 탈 때, 자동차 사고보다 더 불안한 이유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통제할 수 없는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공포 때문"이라며 "국민이 의료 현장에서 느끼는 두려움도 같은 성격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이 수술실 CCTV를 요구한 것도 의사를 감시하려는 의도보다는, 통제할 수 없는 불행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고 싶다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그 불안을 사회적으로 다룰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상징적 장치로 CCTV가 나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정책이사 역시 "의사는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 근무하는 것을 계속 기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금은 장기적으로 결국 의사가 이탈되게끔 하는 시스템이다"라며 "의사가 필수적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처치를 했을 땐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 다만 이 정도 규모의 사법 리스크를 국가가 책임질 의지와 역량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응급실에 최종 치료 책임을 지우는 정책 기조도 이런 사법 리스크 문제가 오히려 심화하는 상황이다. 실제 정부가 발표한 응급의료 개선 계획을 보면 '중증 응급환자의 최종 치료 책임'을 중증응급의료센터에, '경증 응급환자의 최종 치료 책임'을 지역 응급기관에 각각 부여했다.
경증 응급환자라 하더라도 치료가 길어질 경우 다양한 진료과가 연계돼야 하며, 입원이 필요한 사례도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급의료기관에 모든 치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결국 병원 내 자원 고갈과 의료진 부담 가중으로 이어지며, 의료 질 저하로 직결된다는 우려다.
이형민 회장은 "응급실은 응급 치료를 제공하는 곳이지, 최종 치료를 책임지는 곳이 아니다. 응급실에 최종 치료 책임을 지우는 건 의료 현실을 무시한 행정"이라며 "경증 환자라 하더라도 장기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고, 여러 진료과 연계 없이는 감당할 수 없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는 지금과 같은 응급실 뺑뺑이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게 우리 의견"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환자를 수술할지 말지를 사회적 합의로 결정하진 않는다.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판단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정치적 고려나 여론 눈치 보기식 접근이 반복될 경우, 정책 방향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며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된 정책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지금처럼 끝없는 합의만을 반복해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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