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라에서 버스로 1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로비니(Robinj)이다. 하늘에서 로비니를 내려다보면 사람의 눈을 닮았다고 한다. 이스트라반도의 서쪽 해안에 있는 로비니는 인구 14,294명(2011년 기준)이 살고 있는 작은 항구이다.
로비니는 본래 항구 밖에 흩어져 있는 다른 12개의 섬처럼 육지로부터 떨어져 있었지만 육지와 가까웠기 때문에 1763년 섬과 육지 사이의 해협을 메워 육지와 연결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재미있는 것은 아드리아해에 흩어져 있는 200여개의 섬들이 모두 크로아티아에 속한다는 것이다. 아드리아해에 해안선을 두고 있는 보스니아나 마케도니아에는 섬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로비니는 크로아티아어와 이탈리아어를 공용어로 할 만큼 이탈리아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이스트라반도와 몇몇 섬을 이탈리아가 차지하게 되었는데, 무솔리니가 약 4만 명의 이탈리아사람을 이스트라반도로 이주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어만 쓰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가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하는 등 문화말살정책을 펼쳤듯이, 무솔리니 역시 이스트라반도에서 크로아티아어의 사용은 물론 전통문화활동을 금했다는 것이다.
로비니의 역사는 인근에 있는 풀라와 같다. 1283년부터 1797년까지 베니스공화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이곳은 이스트라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마을의 하나였다. 이 시기에 겹으로 된 방어벽을 쌓았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성에는 모두 일곱 개의 문이 있었지만 운하를 메우면서 없어지고 세 개만 남아 있다. 1680년에 세운 발비아치(Balbi's Arch)와 시계탑을 부두 근처에서 볼 수 있다.(1)
발비아치 위쪽에 성 마르코를 상징하는 날개달린 사자상을 새겨놓은 것을 보면 베네치아가 지배하던 시기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출입구의 아치 상단에 터번을 쓴 사람을 조각해놓은 점이다. 시기적으로 보아 오스만제국이 발칸반도를 거쳐 헝가리제국까지 지배하고 오스트리아의 빈을 포위할 무렵이다. 이스트라반도는 아직 오스만제국의 침략을 받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미리 보험을 들어두는 심정으로 투르크사람을 새겨놓았을 것이라고 짐작한다.(2)
시계탑이 있는 중앙광장(티토장군광장이라고도 하는 듯하다)에는 작은 분수가 눈길을 끈다. 무언가를 들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새긴 분수는 비록 1959년에 세워진 것이지만 광장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3)
버스에서 내리면 야트막한 산의 정상에 우뚝 서 있는 성 유페미아 교회가 눈길을 끈다. 성당의 종탑 주위를 날고 있는 갈매기가 한가롭게 보인다. 중앙광장 쪽으로 이동해가는 동안 파르티잔 기림비를 만난다. 1940년부터 1945년 사이에 벌어진 파시스트의 테러로 숨진 투사와 희생자를 위한 기림비(palim borcima i zrtvama fasistickog terora)를 만난다.(4) 이 기림비는 이반 사보리치(Ivan Sabolić)가 1956년에 제작한 것이다. 기림비 앞에는 파르티잔 운동의 투사들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부두 쪽에서 해안을 따라 성 유페미아 교회로 갈 수도 있고, 골목길을 따라 교회의 뒤편으로 갈 수도 있다. 아내와 필자는 골목길을 따라가기로 했다. 좁은 골목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골목으로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작품을 집밖에 걸고 있어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고 해서이다. 다양한 크기의 돌을 깔아 놓은 골목길을 오랜 세월을 자랑하듯 반질반질하게 닳았다. 그리고 골목길을 가로 지르는 빨랫줄에 걸려있는 빨래가 한가롭게 바람에 날리고 있다.
크로아티아의 지방에서 흔히 만나는 테라물라(Tiramola)라고 부르는 골목길 빨랫줄은 테라(당기다)와 물라(놓다)의 합성어이다. 그 옛날 크로아티아에서는 베란다가 넓을수록 세금을 많이 내야 했다고 한다. 빨래를 걸 베란다 공간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은 골목을 두고 마주 한 집과 집 사이에 이렇게 빨랫줄을 연결해서 빨래를 널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골목을 걸어갈 때는 느닷없이 쏟아져 내리는 물벼락을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크로아티아 여인들은 골목을 내다보지도 않고 빨랫물을 골목에 쏟아버린다는 것이다.
언덕길을 따라 오르는 골목에서 벗어나면 바로 교회 마당이다. 교회 앞으로 파랗게 펼쳐지는 아드리아해가 환상이다. 로비니의 유서 깊은 지역의 심장부에 서 있는 지금의 성 유페미아 교회(The church of St. Euphemia)는 바로크양식으로 1736년 지어졌다. 성 유페미아 교회에는 15세기의 고딕양식의 조각을 비롯하여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친 유화작품들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 '겟세마네에서의 마지막 만찬과 예수(Last Supper and Christ in the Gethsemane.)'가 유명하다. 종탑은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교회의 종탑과 닮았다. 1654년에서 1680년 사이에 안토니오 마노폴라(Antonio Manopola)의 설계로 세워진 60m 높이의 종탑에는 성 유페미아의 입상이 풍향계로 서 있다.(5)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탄압이 극에 달했을 때 순교한 성 유페미아는 290년 소아시아의 칼케돈(Chacedon)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15살이 되었을 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배교하지 않았고 결국 사자에게 던져져 죽음을 맞았다.
그녀가 죽은 뒤 칼케돈 사람들은 그녀의 유해를 잘 수습하였고, 620년 페르시아군이 쳐들어왔을 때 콘스탄티노플의 히포드럼에 있는 교회로 그녀의 유골을 옮겼다. 800년 성상파괴운동이 극심해졌을 때 기독교도들은 그녀의 유골함을 치우라는 압박을 받았다.
그때 성 유페미아의 대리석 유골함이 바닷물에 떠서 로비니 해안까지 왔다는 것이다. 로비니사람들이 유골함을 끌어올려 성 조지교회에 모시려했지만 실패하던 끝에 두 마리의 작은 소를 끌던 소년이 유골함을 언덕 위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로비니사람들은 이를 기적이라고 해서 성 유페미아를 마을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되었다.(6) 그때까지 성 조지를 모시던 교회가 성 유페미아 교회로 바뀌게 되었다.
성 유페미아 교회의 마당 끝에는 바다를 향해 대포가 놓여 있다. 그 옛날 아드리아해는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나 보다. 대포에서 언덕 아래로 빨간 지붕을 얹은 집을 지나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먼 바다를 건너 항구로 들어오는 배와 바다로 나가는 요트가 그림처럼 예쁘다. 교회와 주변을 돌아보고 다시 골목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가기로 했다. 골목에서는 창문에 핀 예쁜 제라늄꽃이 눈길을 먼저 붙들었지만, 이내 벽에 양각해놓은 나뭇가지가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골목을 모두 내려와 중앙광장으로 나오면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하고 있는 항구와 거리에 늘어서 있는 식당들이 눈길을 끈다. 브란친(Brancin)이라는 이름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주요리로 시킨 미트 파스타도 좋았지만, 밀전병 같은 후식이 맛있었다. 120년에 걸쳐 문을 열고 있다는 전통에서 우러나오는 맛인가 보다. 준비한 식사 이외에도 해물피자에 와인을 곁들이면 참 좋을 것이라는 인솔자의 추천에 따른 일행이 있었고, 그 바람에 약속한 시간에 출발하지 못했다. 즉흥적으로 일정관리를 하는 모양이다.
참고자료
(1) Wikipedia. Robinj.
(2) 오동석 지음. 크로아티아 여행 바이블 34쪽, 서영, 2013년.
(3) The main square of Rovinj (M. Tito).
(4) Wikipedia. List of Yugoslav World War II monuments and memorials in Croatia.
(5) Wikipedia. Church of St. Euphemia, Rovinj.
(6) InfoRovinj. The legend of St. Euphem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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