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새벽 4시. 건강보험공단 박경순 징수상임이사(59)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이른 새벽 잠에서 깬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녹차 한잔. 그리고 조간 신문과 전날 읽지 못했던 서류들을 읽어 내려간다.
박 이사는 출근 전 새벽에 주어지는 약 2시간여의 시간이 머리가 제일 맑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박 이사는 문득 "뭔가 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됐단다.
건보공단에서 4급 과장, 3급 차장에 이어 본부장, 징수상임이사까지…
남성 중심의 조직에서 '여성 최초'라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
박 이사는 "현재에 충실했다"라고 답을 내렸다.
박경순 징수상임이사
"어디서나 현재에 충실하고 있으면 그게 쌓여서 공적이 됐습니다.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며, 똑같은 일을 해도 진이 빠지도록 열심히 하면 위기가 기회가 되더라구요."
박 이사의 표현을 빌리면 현재에 충실하고 있을 때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다고 한다.
5급 고졸 여사원이 건보공단 징수상임이사직까지 올라오기까지 실제로 박 이사는 보이지 않는 손들의 도움을 받아왔다.
고3 시절 담임선생님은 박경순 이사가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공장으로의 취직을 희망하자 경상북도 지방공무원의 길을 추천했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인근 면사무소로 첫발령을 받았지만 여직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면장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면장은 일손도 부족한데 힘도 없는 여직원을 보냈다고 군청에다가 항의 전화를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박 이사는 한 달만에 부츠굽이 다 닳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고, 결국에는 면장의 신뢰를 받았다.
면장은 훗날 의료보험이 통합되기 이전인 '공무원 및 사립학교교직원의료보험관리공단'에 박 이사가 경력직으로 입사할 수 있도록 권유할 정도로 조력자가 됐다.
의료보험관리공단에서도 박 이사에게 기회는 찾아왔다.
박 이사가 근무하게 된 부산지부에는 남직원이 30%밖에 되지 않아 여성이 남자 몫의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입사 당시 의료보험관리공단은 남성 중심의 직장이었습니다. 여직원은 대부분 남자 직원의 보조나 타자, 전산입력을 하는 정도였습니다. 당시 지사장은 본부에 남자직원을 보내달라고 늘 호소했지만 저에게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됐습니다."
덕분에 박 이사는 기관관리, 보험료 적정납부 실태조사, 부당이득금 결정, 소송 등 주도적인 일을 할 수 있었다. 여성으로 처음 현장의 차장이 됐다.
"밤을 새우며 공사현장 확인을 하고, 외근 다녀오는 직원을 기다렸다가 늦은 저녁식사를 하며 소통했습니다. 보험급여팀장 때는 초진기록과 본인 신고서, 전산자료 등을 면밀히 살펴 전국 최고의 실적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왜라고 한번만 더 생각해보면 답은 있다"
열정을 인정받은 박경순 이사는 건보공단 부산남부지사장, 고객지원실장을 거쳐 2011년 대구지역본부장으로 승진했다. 여성으로서는 처음이었다.
박 이사는 고객지원실장으로 있을 때는 '미흡'이었던 공공기관 고객만족도를 두 단계 올려놨다.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서비스 현장을 점검해 VOC시스템을 만들고, 고객센터와 홈페이지를 개편했다.
본부장 승진 후에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평소 생각을 밀어붙여 본부 관할권의 31개 지사를 돌면서 1299명의 직원을 만났다. 박 이사는 울릉도 지사까지 방문하고 나서야 지역 현황 등을 보고서로 정리해 본부에 보고했다.
대구지역본부장으로 지낸 1년 6개월 동안 각 지사를 3번씩이나 방문할 정도로 발로 뛰었다.
2013년 부산지역본부장으로 취임해서도 박 이사의 남다른 추진력은 이어졌다.
부산 광안리에서 진행한 '건강보험 걷기대회'에 참가인원이 5000명에 달할 정도로 소위 말해 '대박' 행사로 만들었다.
박 이사는 "단순히 걷기대회를 한다는 홍보뿐만 아니라 소비자 단체 등 유관기관과 협약을 맺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다. 같은 사안이라도 왜라고 한번만 더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라고 강조했다.
박 이사는 여성만이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인 '모성애'와 '포용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디지털 시대에서 여성이라는 것은 장점이지 단점이 아니다. 생각하고 그것을 업무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치있는 일을 생각하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라"
그는 앞으로 남아 있는 임기 동안 징수상임이사로서 가장 먼저 할 일로 '소득중심의 보험료 부과체계 개편'을 꼽았다.
현행 부과체계는 복잡하고 변화하는 사회현상을 반영하지 못해 형평성이 없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일환으로 보험료 관련 민원이 연간 5800만건이고, 전체의 81%나 차지하고 있다.
건보공단은 소득중심의 보험료 부과체계 개선안을 정부에 제안했고,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7월부터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선 기획단'을 구성 운영하고 있다.
박 이사는 3월까지 운영하는 기획단을 적극 지원할 예정이다. 이밖에도 현재 건보공단이 주력하고 있는 담배 소송 지원과 함께 건강보험제도에 대한 국민 만족도 향상, 4대 사회보험료 통합징수 업무 효과 높이기 등이 있다.
박 이사는 끝으로 "가치있는 일을 생각하고, 크게 꿈꾸며, 메모를 습관화하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라"고 말했다.
그가 미래를 꿈꾸는 젊은 여성, 나아가 젊은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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