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여행 4일째이다. 여행이 반환점을 돌고 있는 것이다. 모닝콜이 올릴 때까지 통잠을 잤다. 전날 장시간 버스를 타느라 시달린 탓도 있겠지만, 이제는 몸이 어느 정도는 터키시간에 맞춰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샤워를 하고 객실을 나서는데 후끈한 느낌이 든다. 전날까지 서늘한 아나톨리아 고원을 훑다가 남쪽, 게다가 기온이 높은 해안가로 내려온 탓에 그런가 보다.
안탈리아 지역은 여름에는 30도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고 겨울에도 섭씨 15도 이하로 내려가는 법이 없어 온화한 날씨에 습하지 않아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보여 유럽의 여행자들이 찾는다고 한다.
타우로스 산맥의 산자락 아래 지중해변을 따라 펼쳐지는 지역을 팜필리아라고 부른다. 그리스어에서 따온 팜필리아는 ‘모든 민족의 땅’이라는 뜻이다. 해발 3,000~3,700m의 산들이 늘어선 타우로스산맥은 해발 600~1,200m인 아나톨리아고원과 고도 100m 미만인 팜필리아 지역을 가르는 분수령이 된다. 팜필리아 지역에는 해안을 따라 100여개나 되는 고대도시들의 유적이 흩어져 있다.
고대 히타이트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 지역은 리디아왕국, 페르시아제국을 거쳐 그리스에 귀속되었다가 셀레우코스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안탈리아에서 25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선사시대 이전 사람들이 거주하던 카라인 동굴이 있다.
안탈리아는 기원전 158년에 세워졌는데, 시데에 견줄만한 항구도시를 건설하기로 작정한 페르가몬왕국의 아탈로스2세가 ‘땅 위의 천국’이 될 만 한 곳으로 낙점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 도시를 건설한 왕은 아탈로스의 도시라는 의미로 아탈레이아라고 부르도록 했다.
아탈레이아는 페르가몬왕국이 로마에 넘어간 다음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폼페이를 닮은 도시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안탈리아 부근에는 그리스-로마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고대도시 테르메소스 유적지가 있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페르게, 아스펜도스 그리고 시데 등 세 도시가 있어 볼거리도 많지만 이번 여행에서 일정에 포함되지 않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하고 말았다.
아탈레이아는 로마제국을 이은 비잔틴제국에 속했다가 1207년 셀주크 투르크로 넘어갔고, 셀주크 투르크 사람들은 이곳을 안탈리아라고 부른 것이 굳어져 오늘에 이른 것이다. 모로코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셀주크 투르크 시절의 안탈리아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안탈리아는 아주 훌륭한 도시로서 대단히 넓다. 이 지역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건물도 가장 많으며, 구획도 가장 잘된 도시다. 주민들은 같은 파(派)끼리 살면서 다른 파와는 격리되어 있다. (…) 시 변두리까지 큰 성벽이 둘러싸고 있다. 시내에는 과수원이 있어 질 좋은 과일을 생산한다. (…) 이곳에는 샘도 여러 군데 있는데 물맛도 좋거니와 여름에는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1) 바투타의 기록을 보면 셀주크 투르크 시대에 안탈리아에는 기독교도 로마인, 유대인 그리고 무슬림들이 각자의 구역을 이루고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날보다 늦게 일정을 시작했지만 날이 밝기 전에 호텔을 나선 우리 일행은 하늘이 희끄무레 해질 무렵 카라알리올루 공원(karaalioglu park)에 도착했다. 해안 절벽 위에 있는 공원에서는 왼편으로 먼 길을 달려와 지중해에 풍덩 빠질 듯한 타우로스 산맥의 연봉을 볼 수 있고, 공원 앞으로는 탁 트인 지중해가 열려 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안탈리아를 차지한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그야세딘 케이휘스레브 1세(I. Gıyaseddin Keyhüsrev) 의 기마상을 만난다. 멀리 타우로스 산맥을 가리키고 있는 품을 보면 저 높은 곳을 넘어 이 곳에 왔다는 표시일까 싶다.
공원에서는 셀주크 투르크 시대에 세운 모스크에 있던 이블리 미나렛(Yivli Minaret)의 아름다운 모습과 칼레이치라고 부르는 구시가지도 굽어볼 수 있다. 1230년 그리스 정교의 교회를 모스크로 개조하라는 셀주크의 술탄 알라아딘 케이쿠바드 1세(Ala ad-Din Kay Qubadh I)의 명에 따라 지은 이블리 모스크에 지은 미나렛이 이블리 미나렛이다. 술탄의 이름을 따서 알라딘 모스크라고도 부르던 원래의 모스크는 14세기 무렵 파괴되어 1373년 새로 지었다.
6개의 돔으로 된 이블리 모스크는 복수의 돔으로 된 건축물로는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2)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블리 미나렛은 8개의 원통으로 이루어진 기둥이 독특하여 위에서 내려다보면 꽃잎모양으로 보인다고 한다. ‘아름답고 맑은(flute)’라는 의미를 담은 이블리 미나렛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이슬람의 숭고한 뜻을 노래에 담아 울려 퍼지게 하는 듯하다.
부두로 내려갔더니 해적표지를 단 범선들이 여러 척 정박하고 있다. 기원전 88년 흑해 남쪽을 기반으로 하던 폰토스 왕국이 로마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무렵, 팜필리아 동쪽의 킬리키아 지방을 중심으로 해적들이 창궐했다고 하는데, 그런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관광상품인 모양이다. 우리 일행은 7시경 출항하는 해적선을 타고 제일 먼저 바다로 나갔다. 이 항해는 항구 왼쪽으로 이어진 절벽을 따라 두덴(Düden) 폭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항로이다.
배에 올라 보니 오른 손에 칼을 쥔 해적 선장이 뱃머리에 서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다. 배 가운데 마스트가 서 있고 돛을 달 수 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바람이 일지 않은 탓인지 돛을 올리지 않고 동력으로 움직이고 있다. 유람선이라면 뱃머리에서 영화 타이타닉의 명장면을 떠올리기 마련이겠지만, 우리가 탄 해적선에서는 그런 낭만적인 장면은 연출할 수도 없겠다.
배가 출항하고 잠시 뒤에 동편 절벽 위로 해가 떠오른다. 절벽 위에는 널찍한 베란다를 가진 집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곳에 앉아 지중해의 수평선을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면 숨이 멎을 것만 같다. 하지만 절벽 아래 바다로 떨어지는 아침 햇살도 충분히 아름답다. 절벽 아래로는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나와 아침 수영을 하는 마니아도 있다. 이 지역의 수온은 겨울철 평균 16도, 여름철 평균 27도 사이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늦게까지 수영을 즐길 수 있는 모양이다.
폭포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수량이 풍부해서인지 물보라가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가 탄 배까지 몰려온다. 두덴폭포는 바다로 떨어지는 하부 폭포에 더하여 절벽 위에도 아름다운 상부 폭포가 있는데, 배에서는 볼 수 없어 아쉽다. 제주도에 있는 정방폭포가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폭포라고 들었는데, 소아시아반도에 있는 안탈리아도 아시아대륙에 붙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방폭포에 대한 설명을 바꾸어야 할 것 같다.
폭포 너머 어딘가에 공항이 있는 모양으로 폭포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가 꼬리를 문다. 안탈리아는 바다는 물론 기후도 늘 온화한 탓에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해양 휴양지인데, 배경이 되는 팜필로나 지방에 흩어져 있는 고대유적을 찾는 관광객들까지 이어지면서 안탈리아 공황은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공항에 이어 두 번째로 입국자가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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